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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희준 Mar 13. 2024

최종화. 노을

<흑마법서> 소설 연재

 여기까지가 무한을 창조한 자, 여왕의 약혼자, 도깨비의 친구, 성스러운 속물, 불사신 서점 서울 지점의 사장 김지훈의 이야기이다. 여기서부터 그는 다시 보잘것없는 마법사 지망생이자 고등학교 자퇴생이었다. 전부 교활한 포메라니안 하나 때문에 그가 포기한 것들이었다. 그는 후회하진 않았지만 기분이 우울했다. 하지만 우울하긴 해도 후회하지는 않았다.


 파괴된 흑마법서는 저절로 불이 붙어 타기 시작했다. 혜성은 바닥에 앉은 채 책이 불타는 모습을 보며 훌쩍거렸다. 김구름도 그의 옆에 말없이 앉아 있었다.


 한참 동안 울던 혜성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김구름을 보며 울먹였다.


 “처음부터 흑마법서를 이렇게 쓸 목적으로 저를 불렀던 거예요?”


 “네.”


 김구름이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원래는 제국의 인드라망을 파괴하려고 했지요.”


 “그럼 예전에 제국의 인드라망을 공격한 그 테러범이......”


 “저와 이 부장입니다.”


 “이 부장님도......”


 김구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바로 서울 지점의 전임 사장이었습니다. 사장이던 시절 저는 티베트에서 마법서를 공부하며 적마법서를 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고 제가 한국에 돌아왔을 때 우리 가족은 풍비박산난 상태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노예 사냥꾼에 의한 인신매매가 횡행했는데, 그때 어린아이였던 지훈이가 어느 날 노예 사냥꾼에게 납치되어 끌려가 노예가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제 아내는 지훈이를 구하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애썼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결국 제 아내는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하고 말았죠.”


 김구름이 담담하게 말했다.


 “엄마가 죽고 몇 년 후 지훈이는 노예에서 탈출한 뒤 노예해방전선을 조직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지훈이를 어렵게 다시 만났을 때 그 아이는 이미 노예해방 운동을 활발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어린아이가 그런 일을 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지만 저는 그 아이가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지훈이가 갑자기 행방불명되어 버렸죠.”


 김구름은 조용히 눈물을 닦았다.


 “저는 그때 제국이 지훈이를 죽였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가능성은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었어요. 제국에게 복수하고 싶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쥐어짜 내서라도, 아내와 아들을 죽인 제국에게 복수하고 싶었습니다.


 사장님은 자신을 속물이라고 하셨지만 저야말로 진짜 속물입니다. 제국과의 계약을 거부해서 온갖 고초를 겪은 사장님과 달리 저는 평생 책을 쓰는 것 말고는 어떤 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저도 아내와 아들의 죽음을 겪은 뒤에는 이 잘못된 세상을 바꾸기 위해 뭐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적마법서로 제국의 인드라망을 공격하셨군요.”


 혜성의 말에 김구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그 적마법서를 쓰는데 평생을 바쳤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제게는 책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제국의 인드라망 발전소에 침입하기 위해서는 정말 오랜 시간과 노력을 쏟아야 했습니다.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고, 이 부장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실패했을 것입니다. 저와 함께 티베트에서 같이 오랫동안 마법서를 공부한 이 부장은 제 아내와 아들의 죽음을 보고 제 뜻에 동참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마침내 간신히 발전소 중 한 곳에 침입할 수 있었지요. 그때는 우리가 제국의 인드라망을 완전히 파괴해서 제국에게 큰 타격을 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우리가 침입했던 곳이 중앙 발전소가 아니었던 점, 그리고 적마법서로는 인드라망을 완전히 장악하기에는 부족했던 점 때문에 인드라망에 작은 손상밖에 입히지 못하고 이무기를 풀어주는 엉뚱한 결과만을 초래했죠.”


 그러면서 김구름은 눈물을 닦았다.


 “그 때문에 사장님의 부모님이 돌아가실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죄송해요.”


 혜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구름은 계속해서 울먹였다.


 “정말 죄송해요......”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다. 마침내 침묵을 깨고 혜성이 물었다.


 “그래서 그다음에는 어떻게 된 거예요?”


 김구름은 울음 섞인 기침을 한 뒤 말을 이었다.


 “테러가 실피한 이후 저는 실의에 빠져서 폐인이 되어 버렸고, 불사신 서점은 사실상 망한 가게나 다름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이 부장은 폐인처럼 살고 있던 저에게 ‘적마법서보다 강력한 흑마법서를 쓸 수 있을 만한 인재를 찾아보자’고 했지만 저는 아무 의지도 의욕도 없어서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이 부장은 제가 도와주지 않자 결국 혼자서 다른 여러 마법사들을 만나고 자료 조사를 하면서 흑마법서를 쓸 수 있는 사람을 찾았지요. 그리고 결국 사장님이 어린 시절 쓴 논문을 발견하게 된 겁니다.”


 “아, 그 논문......”


 “그렇게 해서 사장님이 지금까지 쓴 주문을 저희에게 메일로 보내주셨을 때 저는 그 놀라운 주문을 보고 흥미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서점이 철수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도박을 해보자는, 혜성 씨를 사장으로 앉히고 그에게 흑마법서 주문을 쓰게 해 보자는 이 부장의 말에 설득되어서 사장님을 불렀던 것입니다. 사장님의 주문을 보고 전 다시 희망이 생겼습니다. 아들의 원수를 갚을 수 있다는 희망, 다시 살아야 할 이유가 생겼다는 희망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백두산에서 머리를 맞고 기절하셨죠.”


 혜성의 말에 김구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 아내와 아들이 그렇게 애썼는데도 세상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해방이 되고 정부가 바뀐 후에도, 그리고 노예제의 진실이 드러난 후에도 세상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깨어난 후 원래의 제 계획을 그대로 진행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말을 마친 뒤 잠시 말없이 불길을 바라보던 김구름이 말을 이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김구름이 눈물이 가득 괴인 눈을 비볐다. 혜성 역시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김구름을 쳐다봤다.


 “당신이나 당신 아들을 위해서 그런 게 아니에요.”


 혜성이 말했다.


 “제가 속물인 거 아시죠? 당신을 위해서 그런 게 아니에요. 나를 위해서 그랬던 거예요.”


 혜성은 눈물을 닦으며 물었다.


 “김지훈은 어떤 아이였어요?”


 김구름도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우리 지훈이는 조용하고 내성적인 모범생이었어요. 하지만 다정다감하고 착한 아이였죠.”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말없이 흑마법서가 불에 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불길에 휩싸인 긴 종이는 이제 조각조각 찢어진 채 위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그때 그들의 뒤에서 건물의 잔해를 치우는 소리와 함께 여왕의 목소리가 들렸다. 


 “혜성아, 여기 있어?”


 혜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무너진 잔해로 다가갔다. 그가 커다란 돌조각 몇 개를 치우자 구멍이 드러났다. 구멍 사이로 여왕이 넘어와 그를 끌어안았다.


 “혜성아!”


 혜성은 여왕의 품에 안겨 눈물을 흘렸다. 여왕도 눈물을 흘렸다.


 “다 끝났어. 연방의 군대를 정지시켰어.”


 여왕이 혜성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제 한반도의 인드라망은 우리가 조종할 수 있는 거야.”


 “네가 매려의 왕에서 한국의 왕이 되는 순간이구나.”


 혜성이 중얼거리자 여왕은 미소를 지었다.


 “네가 한국의 왕이지. 자, 나가자.”


 여왕은 혜성을 부축하며 함께 밖으로 나갔다. 김구름도 그들을 뒤따랐다.


 태초함은 발전소 옆에 착륙해 있었다. 함선 옆에는 도깨비들과 서점 직원들이 혜성을 기다리고 있었다. 혜성이 다가가자 그들은 말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박 차장님도 저를 속인 거예요?


 혜성의 물음에 박준식이 황급히 손을 저었다.


 “전 아닙니다. 저도 방금 알았어요.”


 그러나 이태민은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부장님은.......”


 “죄송합니다.”


 이태민이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김구름이 혜성에게 다가왔다. 그는 혜성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혜성은 말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고맙습니다.”


 김구름이 울먹였다.


 “죄송합니다.”


 혜성은 고개 숙여 울고 있는 김구름을 말없이 쳐다봤다. 그는 김구름이 안쓰러웠지만 도저히 그를 위로해 줄 수가 없었다. 혜성은 그저 눈물을 닦기만 했다.


 그때 박준식이 한 손에 휴대폰을 든 채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저기 사장님, 본사에서 온 사람들이 지금 우리 지점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오늘이 마침 계약 만료일이라서 사장님에게 지금까지의 마법서 제작 및 판매 성과에 대한 설명을 듣고자 한답니다.”


 그 말에 혜성은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제작 성과는 전혀 없는데.”


 “그러니까 가셔서 그걸 설명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가 봐.”


 여왕이 말했다.


 “우린 이곳을 정리하고 있을게. 인드라망의 관리를 위해서 서점 직원 분들도 여기 남아주세요. 당분간은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혜성이 너 혼자 서점에 가도 괜찮나?”


 “응, 괜찮아.”


 마침 기차역 한 곳이 발전소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들은 함께 역까지 걸어갔다.


 어느새 하늘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혜성은 울지 않으려고 했지만 자꾸만 눈물이 났다. 걸어가다가 몇 번이나 멈춰서 여왕이 그의 눈물을 닦아줬다.


 기차역에 도착하자 마침 시간이 딱 맞는 기차가 하나 있었다.


 기차 앞에서 여왕은 혜성을 안아주며 말했다.


 “넌 내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야. 가장 부러운 사람은 아니지만.”


 여왕은 눈물을 닦으며 웃었다.


 “그래서 더 존경하지.”


 “노예제를 꼭 해결해 줘, 알겠지?”


 혜성의 말에 여왕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탄광 노동자를 자원해서 뽑을 수 없다면 모든 국민이 평등하게 노동을 해야 할 거야. 말했다시피 여기에는 나도 예외가 될 수 없어.”


 “누군가에게 좀 더 평등하다면 그건 평등이 아니니까.”


 혜성의 말에 여왕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혜성의 눈물을 닦아준 뒤 말했다.


 “기차 출발한다. 얼른 가 봐.”


 기차 안이 만원이라 혜성은 기차 지붕 위로 올라가 앉았다. 그가 자리에 앉자마자 기차가 출발했다. 여왕과 도깨비들, 그리고 김구름과 이태민과 박준식이 그를 배웅했다.


 혜성은 그들을 보며 생각했다.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그래, 나는 책을 만들기 위해서 불법을 저지르고 남을 협박하고 이용했잖아. 그러니 어쩌면 죗값을 받는 것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하지만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야.’


 기차는 한강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혜성은 노을이 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때 허공에 뭔가가 흩날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흑마법서였다.


 불이 붙은 흑마법서의 조각들이 허공에 흩날리고 있었다. 마치 불붙은 벚꽃 같았다.


 혜성은 그 모습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그가 10년간의 세월을 바친, 그의 인생이, 그의 작품이, 위대한 문학이 불타 사라지고 있었다.


 혜성은 잠시 그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손을 뻗어서 공중에 흩날리던 종잇조각 하나를 붙잡았다. 그리고 종이에 붙은 불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불을 붙이자마자 종잇조각은 불타 사라져 버렸다.


 담배 연기를 내뿜자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이 배어 나왔다.


 “진짜 좋은 책을 쓰고 싶었는데.......”


 불타는 흑마법서의 조각들이 벚꽃처럼 흩날렸다. 온 세상이 불붙은 벚꽃으로 가득한 것만 같았다.


 기차는 한강 다리 위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해가 천천히 한강 아래로 내려가면서 강물이 붉게 물들었다. 김혜성은 담배를 문 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한강 위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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