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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문 May 01. 2024

엄마의 정월대보름

2024.02.24.(토)

엄마가 말한다.

"지문아 엄마 오곡밥 할 거거든? 꼭 글로 써줘"

뭔 소리냐 이게. 엄마는 무슨 글이 버튼만 누르면 띡 하고 나오는 것이라 생각하는 건가? 오곡밥 하는 걸 어떻게 글로 재밌게 쓰냔 말이다. 게다가 난 요리 블로거가 아니라 일상, 생각관련 글을 쓰는 블로거다. 그래도 단칼에 거절하면 우리의 대문자 F 엄마는 상처받을 테니 최대한 스윗하게 말해준다.

"아 몰라. 봐서"

정월대보름인 다음날 아침 엄마가 말한다.

"엄마 다 차려놨어 빨리 사진 찍어줘"

봐서 한다고 했지 한다고 한적은 없는데 엄마는 나랑 다른 한국어를 쓰는 것 같다. 일단 찍어 달라니까 찍어 준다.









남들이 보기엔 진수성찬이지만 나한텐 생고문이다. 현재 크론병 변비를 앓고 있는 나는 장에서 소화가 힘든 나물류를 최대한 피해야 하기 때문이다. 슬프게도 난 늙은이 입맛을 갖고 있는 젊은이다. 누구보다 나물을 좋아한단 말이다. 제임스 본드도 이런 고문을 받는다면 비밀을 술술 불 것이다. 나는 눈물을 머금고 엄마의 쇼윈도 밥상에서 내가 먹을 수 있는 것만 골라 먹기 시작했다.


"아빠가 어제 엄마 보고 왜 맨날 힘들게 그걸 다 하냐고 이제 그만해도 되지 않냐 물어보더라고. 그 말을 들으니까 갑자기 '나는 이 힘든 걸 정월 대보름마다 왜 맨날 하고 있지?' 하는 생각이 드는 거야. 그런데 그 이유를 알았어."


엄마는 묻지도 않은 걸 술술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나의 투머치토커 유전자가 누구로부터 온 건지 눈에 선하다. 아침밥은 사색하며 먹고 싶었지만 밥값을 할 겸 들어주기로 했다.


"우리가 개보름날 모여서 놀면 목적이 또 있었어. 이걸 밥을 읃으러 가잖아"


밥을 얻으러 간다고? 왜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모른다 나는. 우리는 누굴 말하는 것인가. 개보름은 또 뭐냐. 대보름을 잘못 말한 것인가? 물을게 산더미지만 그냥 듣는다.


"그럼 우린 밥만 읃으러 가는 게 아니야. 저희가 세배를 드릴게요 이래. 1월 1일이 지났잖아. 우린 이제 윗사람들이니까 세뱃돈을 생각하잖아. 그니까 우린 사실 세뱃돈을 노리고 세배를 한다 얘기를 하는 거야.

"응"

"그럼 어떤 분들은 그래그래그래 얼른 들어와 하면 얼른 세배하고 세뱃돈 받고 밥도 읃어갖고 나오는 거야. 근데"

"아니. 그걸 그냥 동네 아무 어른한테나 다한다고?"

"어 옛날에는 그랬어. 그니까 우리는 엄청 재밌는 행사였지. 동네 애들이 한 10명 20명이 모이는 거야. 보름 전날은"

드디어 엄마가 말한 '우리'가 어떤 집단인지 알게 됐다.


"그럼 이제 용돈을 걷어"

"아니 근데 왜 정월 대보름에 용돈을 줘? 용돈은 설날에 받는 거 아냐?"

"아니 그니까. 각자 가정에서는 설날에 했지만 남의 집까지는 못 가는 경우가 많잖아."


나는 모른다고.


"그런데 이제 개보름은 남의 집에 방문해도 되는 날인 거야. 유일하게. 그냥 막 사람들이 집집마다 먹을 걸 해놓고. 우리는 보름달을 보면서 밥을 훔쳐다가 먹든 읃어다가 먹든 그걸 막 읃은걸 비벼가지고 같이 먹으면서 윷놀이도 하고, 나가서 이제 개불놀이도 하고 이런 것들을 하는 거야. 이게 옛날에 미신을 쫓는 그런 거잖아"

"아 쥐불놀이가 정월대보름에 한 거야?"

"그래! 근데 그거를 깡통을 삼촌이 이렇게 칼로 찢어줘가지고 철사를 매달아줘. 그럼 거기다 나무를 넣어서 불을 댕기면 이렇게 이렇게 하면 잘 타는 거야"

고사리를 반찬통에 담고 있던 엄마는 느닷없이 허우적거리며 쥐불놀이 시범을 보여준다. 고사리가 올림픽 체조선수 마냥 휘리릭 하고 날아가더니 전자레인지 손잡이에 철퍼덕 붙는다. 이따가 내가 닦아야 한다. 요즘 말로 정말 킹받는다. 

"그럼 그게 그렇게 재밌는 거야. 나는 또 오빠가 있잖아. 그니까 그 개불이깡통이 늘 많았단 말야 집에. 그래가지고 이제 딱 준비해서 가는 거야. 그렇게 집집마다 가면은 지금도 기억나는 몇 분이 있어. 항시 "어 바보들 왔냐~" 이러면서 밥은 한쪽에다 다 준비해 놓고 "어 들어와들어와 세배하려고 왔지?" 막 이래. 그럼 우린 가서 세배를 단체로 해"

"응"

"그럼 이제 다 용돈을 주는 거야. 그니까 이게 얼마나 재밌어. 친구들과 같이 전날 다 모여서 여럿이 다니면서 밥도 얻고 용돈도 받고. 우리가 이렇게 집집마다 다 돌으면 사람이 없는 집은 가서 밥을 훔쳐 와. 그니까 훔쳐 가는 것도 원래 재미에 들어 있었던 거야"

충격이다. 이거 완전 현실 GTA 아닌가? 밥을 훔친다니. 솔직히 재밌을 것 같다. 가서 사탕 달라 구걸하는 미국 할로윈은 애기 수준으로 보인다.

"근데 뭐라고 안 해. 그니까 개보름 날은 애들이 와서 밥을 훔쳐 가도 "이 녀석들이 가져갔구나!" 하고 그냥 냅둬"

"밥을 훔쳐 간다고? 그냥 부엌에 가서?"

"응 그 집에 있는, 예를 들어 그 집 김치가 맛있잖아."

"아니 흰쌀밥을 훔쳐 간다고?"

"아니 오곡밥. 니가 지금 먹고 있는 거. 정월대보름엔 다들 오곡밥을 해놓으니까. 아무튼 집집마다 반찬이 맛있는 게 있잖아. 그럼 그 집에 가서 그 반찬을 훔쳐 오는 거야. 근데 이제 이만한 양푼을 하나 갖고 다녀. 그럼 사람들이 거기다 준단말야? 사람들이 없으면 우리가 훔쳐서 넣고."

"응"

"그리고 이제 그걸 다 받아왔으면 다 넣고 고추장이랑 같이 비벼. 그니까 여관 하는 집이 한집 있었어. 항시 그 집이 방을 내줬어. 큰 방을 두 칸을"

"응"

"그럼 거기서 모여가지고 그걸 다 같이 먹고, 윷놀이하고, 돈 걷어서 과자 사 와서 과자 먹고. 그리고 단체로 거기서 자는 거야. 그러고 내일 또 놀고! 그래가지고 14일 날 15일 날은 진짜. 너~~~무 재밌었어. 막 노래자랑도 하고. 지금 생각하면 엄마는..."

"왜 14일, 15일 둘 다 그래? 원래 전날부터 노는 거야?"

"원래 개보름날 그런 걸 먹고 개보름날 다니는 거라 하더라고 옛날 으른들이. 내 생각엔 개보름이 밤 열두시잖아"

엄마는 남들 머릿속과 자신의 머릿속이 똑같은 줄 아는 것 같다. 꼭 이렇게 '너도 알지?'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한다. 나는 모른단 말이다. 들을 때 마다 정말 울컥한다.

"그니까 밤 열두시부터 보름이니까 개보름날부터 움직여서 밤 12시부터 보름을 온전히 다 재밌게 지내라는 뜻이었던 것 같아. 몰라 아무튼 옛날 사람들은 다 개보름날 밥을 해놓더라고"

"개보름이 보름 전날이야?"

"응 전날"

젠장 결국 엄마에게 개보름이 뭔지 묻고 말았다. 자꾸 개보름 거리는데 도무지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괜히 자존심 상한다.

"대보름 전날을 우린 개보름이라 했거든. 아무튼 우린 개보름때부터 노는 거야. 그리고 대보름날 또 놀고. 대게 개보름은 친구들과 놀고, 대보름은 가족들하고 논 같은데 풀을 태우는 거야. 그게 뭐냐면 땅에 있는 미생물을 싹 죽이면서 나쁜 액을 액떔한다고 하는 그런 거야. 그래서 옛날에는 논에 있는 볏짚 묶어둔 걸 싹 태웠어"

"그게 몇 살 땐데"

"엄마 어려서니까... 여덟 살 때 국민학교 때지. 국민학교 6년 내내..."

"학교는 안가?"

"그때는 다 놀았지 방학 때니까. 봄방학이었어 항시"

그래서 엄마가 오곡밥을 하는 이유는 도대체 언제 알 수 있는 걸까 생각한다.

"그런데 어제 아빠가 힘들은데 그만하라고 하는 거야. 그래서 어제 늦게까지 이걸 하면서 '나는 도대체 이걸 왜 하는 거지? 너무 힘든데' 생각해 봤는데 엄마는 이걸 하면서 보니까 '아 이 나물은 이 집이 맛있었는데... 저 나물은 저집이 맛있었는데...'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음식을 하고 있더라고"

"오..."

"아 내가 항시 보름만 되면 옛날을 추억하려고 하는구나. 이렇게 나물을 보면 옛날 생각이 나잖아. 친구들하고 막 밥 비벼 먹었던 그 생각이... 우리는 참 재밌게 지냈어"

"으음~"

"그래서 엄마가 저번에 삼촌하고 이야기할 때도 삼촌 그 축하하는 메시지 할 때. 오빠가 어려서 썰매 만들어주고 개불이 깡통 만들어준 거 얘기하면서 울었잖아"

"몰라"

"오빠 덕분에 즐겁게 놀았던 추억이 있어가지고..."

"뭐 일단 됐어 알았어. 나 이제 생각하면서 밥 좀 먹을게"

더 이상 엄마 이야기를 들어주다간 뇌가 터질 것 같아 중단시켰다.

엄마는 노이즈캔슬링 헤드셋을 끼며 김창옥 강연을 들으러 가고, 난 엄마의 이야기를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아침을 먹는다.

이런. 다시 보니 밥이 없다. 엄마가 말을 너무 많이 해서 이야기를 듣는 동안 밥을 다 먹어버린 것이다. 아무리 봐도 밥값이 오버된 것 같다. 엄마의 이야기는 산책하며 정리해 봐야겠다. 귀찮지만 말로만 끝나기엔 아쉬운 추억이라는 생각이 들어 글로 옮길 결심을 한다.

ps.

맞춤법 검사하니까 네이버가 자꾸 개보름을 대보름이라고 고치란다. 솔직히 네이버가 더 믿음직스럽지만 엄마를 믿고 개보름으로 내버려둬본다.

ps2.

엄마는 어제 엄마가 만든 오곡밥과 나물들을 바리바리 싸 들고 할머니가 계신 요양병원에 갔다 왔다. 엄마는 내게 해줬던 이야기를 할머니에게도 똑같이 해줬다.

할머니는 엄마의 이야기를 듣자 오곡밥과 나물들을 만들어 경찰서, 소방서 등 주변의 고마운 분들을 집으로 모두 초대해서 오곡밥을 나눠 주던 게 생각난다고 하셨다.

그 이야기를 듣자 엄마도 내가 초등학생 때 오곡밥과 나물들을 만들어 동네사람들을 우리집으로 초대해서 나눠 주던 게 생각난다고 했다.

엄마와 할머니 모두 그 시절을 그리워했다.

정말 정이 넘치던 시대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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