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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여름은 끝났을까?

by 로캉

우리의 대학생활이 거의 끝나갈 무렵, 나는 현실적으로 시골 교사를 꿈꿨고, 여전히 낭만을 꿈꾸던 정훈이 형은 잡지사 기자가 되었다. 지성이는 정신병원에 한 달간 입원하고 온 후에 토익 공부를 시작했다.



우리의 여름이 끝난 것은 아닐까
지성이의 이상(?) 증상은 아마도 평생을 육체 노동하던 아버지의 말기 암 진단과 다단계에서 1주일 간 잡혀있다가 3층에서 뛰어내려 도망친 후유증과 문학 수업에서의 교수의 공개적 질타(?), 그리고 늘 듣던 핑크플로이드와 너바나의 음악 등이 발단이 아닐까 싶다.
(순전히 나의 개인적 관점이다.)


이제는 선후 관계도 기억나지 않지만, 비가 오는 날에 정훈이 형 자취방에서 장조림과 31가지 맛 아이스크림(정훈이 형 친구가 사장인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얻어 옴, 그 당시에는 동네 아이스크림 가게로만 생각함.)을 안주로 머리만 아픈 진로 포도주에 소주를 섞어 마시곤 했다.


유난히도 장마가 길었던 어느 날에 술 취한 지성이가 사라졌고,

한참 뒤에 빗속을 맨발로 달려가 문학 수업 듣던 교수실 문으로 돌진하던 그를 붙잡고,

화장실에서 숨어 있다가 형과 난 깨달았다.

우리에게 이제 휴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한 달쯤 후에 돌아온 지성이는 스파이 영화같이 약을 혀 밑에 숨기곤 했다고 말했지만 그래도 안정을 찾았고, 얼마 후에 상주로 아버지 장례를 치른 후에는 도서관에서 토익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어려운 시기가 왔고, 대기업에 합격한 이들도 발령이 미뤄졌고 기업은 법정관리나 부도가 났다. 그 와중에 지성이는 은행 정직원이 되었다.

잡지사를 다니던 정훈이 형은 회사 사보 만드는 직원이 되었다가, 어느 때는 과일 장수가 되었고, 어느 해에는 아예 그 길로 가겠다고 국문과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는 가장 나이가 많았지만 가장 어리고 순수했으며, 마음은 가장 젊었고, 최후까지 낭만적이었다. 적어도 내 기억에는.



내가 시골 교사가 되고 더 이상 시를 쓰지 않기 시작할 때에, 현실적 관계에 힘들어하고 허우적거릴 때에,

정훈이 형은 가끔 하던 연락도 없었고, 이제 우리의 여름이 끝나가고 있다는 생각을 할 때쯤에 지성이에게 전화가 왔다.

어제 지성이는 결혼을 했고, 과 후배이면서 나의 동아리 후배인 00과 결혼식 후에 유럽으로 신혼여행을 가려했지만 못 갔고, ,,,, 정훈이 형은 어젯밤에 술 먹고 북한강에서 수영하다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설 같은 이야기……….
머릿속에는 수 없이 많은
추측과 이미지가 시간의 흐름과는 상관없이
뒤죽박죽으로 지나가고
늦은 밤 상갓집에서 새벽까지, 아침까지
시간은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기억은 깊은 호수에서 수면으로 가라앉아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그대도 아닌
가을 새벽에 찬바람이
옆구리 심장 쪽을 찌르고
스쳐지나가는 것을


가끔은 문득,
구릿빛 얼굴에 맑은 눈동자의 그를,
우리가 같이 가길 꿈꾸던 카프카가 거닐던 프라하 거리에서
야상 재킷에 펑퍼짐한 바지를 입고,
가르마를 쓸어 올리고 걸어오는 모습을 볼 것 같아 설레는 것은
아마도 가을이기 때문일 거라 생각해 본다.
그로 인해,
젊은 날 좀 더 순수한 치기를 부릴 수 있었고,
좀 더 무모할 수도,
좀 더 낭만적일 수도,
좀 더 부조리에 화낼 수 있었음을……..
감사한다.


-25.12. 아직도 가을을 보내지 못한 겨울에. 로캉.




글과 상관없는 그림. 숲에서. (25.12.3. 펜+수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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