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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숀앤펀 Feb 06. 2024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

10살 쇼니의 호주 한 달 살기

드디어 호주에 도착했다.

비행기에서 잠 한숨 못 잔 엄마는 많이 지쳐 보이셨다.

우리 캐리어가 뱅뱅 세 바퀴를 돌고 있는데도 엄마는 찾지 않고 멍하니 그 자리에서 30분을 서 계셨다.

나는 엄마에게 우리 캐리어라고 꺼내라고 말씀드렸지만 엄마는 아니라고 아무래도 캐리어가 분실된 것 같다고 신고하러 가신다고 했다.

아무리 봐도 우리 캐리어인데, 나는 엄마에게 우리 거 맞는 것 같다고 이름을 확인해 보자고 했다.

그 캐리어는 진짜 우리 거였다. 우리 캐리어가 세 바퀴나 돌 동안 엄마는 앞에서 멍하니 캐리어를 찾고 계셨다.

엄마가 커피를 안 드신 지 12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엄마는 이런저런 여행준비와 비행기에서는 나를 재운다고 하루를 꼬박 날을 새웠다. 그래서 그런지 엄마는 평소와는 다르게 계속해서 멍텅구리 같은 행동을 하셨다.

엄마와 단 둘이 여행은 어딘지 모르게 내 손해인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점차 현실로 다가오는 것 같았다.

그래도 엄마는 오늘부터 내가 좋아하는 '미션놀이'를 시작한다고 하셨다. 미션놀이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놀이이다. 미션 하나씩 클리어할 때의 그 쾌감이란! 난 매일같이 미션을 달라고 엄마를 조르곤 했다. 엄마는 '미션주기' 전문가였다. 혼자서 운동장 5바퀴 돌기, 줄넘기 100개 하기부터 안마하기, 방청소하기까지 엄마는 소위 미션 크레이터였다.  

 그런데 호주에서의 미션은 영 마뜩지 않았다. 엄마가 준 미션은 바로 하루에 영어로 세 마디씩 말하기였다.

신나게 놀기만 한다고  좋아했는데, 영어 한마디 못 하는 나로서는 상상치 못한 미션이었다.

그래도 '미션'이란 말에 나의 마음은 벌써 꿈틀거렸다. 비록 영어는 못 하지만 나는 MBTI EEEE이자 AB형인 아빠를 닮아 나대기와 오지랖 그리고 자신감과 승부욕 하나는 남달랐다. 그래서 아빠랑 게임하면 늘 파국으로 끝났다. 그러다 하도 둘이 싸우는 통에 엄마가 날 데리고 호주로 떠나겠다고 선언하신 거긴 하지만.. 킁

어쨌든  미션만큼은 꼭 성공하고 싶었다.


나의 첫 번째 미션은 항공기 남자 승무원분께 빌렸던 펜을 돌려주는 것이었다. 영어로 빌려줘서 고맙다고 말하면서 펜을 전달하는 게 나의 미션이었다. 나는 엄마에게 남자 승무원은 영어로 뭐냐고 물어보았다.

엄마는 고민하시더니 간단하게 "Thank you, Sir"라고 말하면 된다고 알려주셨다. 엄마가 몰라서 날 시킨 건가? 순간 자신감을 잃을뻔했지만 나는 침착하게 "Thank you sir"를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그리고 드디어 비행기가 도착하고 나의 첫 번째 미션이 시작되었다. 난 떨리는 마음으로 승무원 아저씨에게 뛰어갔다.

항공기 맨 앞에서 엄마가 빌렸던 펜을 건네며 나는 아저씨에게 크게 외쳤다.

"Yes, Sir!!!"  

나도 모르게 경례까지 붙였다. 경례는 예상에는 없던 거였는데 나도 모르게 손이 날렵하게 올라갔다.

아저씨는 나를 중국 혹은 북한 어린이라고 생각하셨는지 "션머?"로 시작해서 알 수 없는 중국어를 속사포로 쏟아내셨다.

'어라, 이건 예상에 없던 건데' 아빠와 놀았던 습관이 나도 모르게 튀어 나와 적잖이 당황한 나는 펜을 들고 엄마를 돌아보았다. 엄마는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땡큐땡큐땡큐를 백번 외치고 황급히 자리를 뜨셨다.

어쨌든 펜은 돌려드렸으니 첫 번째 미션을 성공했다. 그런데 한번 입이 트이니 한국어를 금세 잊어버릴 만큼 내 입에선 영어가 계속 계속 흘러나왔다.

나는 엄마가 입국심사를 받을 때도, 숙소 체크인을 할 때도 옆에서 아는 단어를 총 동원해 영어로 이야기하며 엄마가 미션 시키기를 기대했다. 엄마는 조용히 하라고 나를 다그치셨지만 나도 엄마만큼 영어를 잘한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라신 눈치였다.

나는 계속

“Dad, what that say?”

라고 말하며 엄마 말씀하시는데 껴들었다. 엄마는 그때마다 눈을 동그라게 뜨고 나를 쳐다보셨다. 그리곤 우리 쇼니 영어학원에서 뭐뭐 배웠냐고 물으셨다.

나는 자랑스럽게 내가 배운 것에 대해 말씀드렸다. 엄마는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고 하셨다.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뿌듯했다.


처음 도착한 호주는 너무나도 깔끔하고 멋진 곳이었다. 내 시력이 더 좋아졌나 생각될 만큼 멀리까지 내가 보고 싶은 많은 것들을 볼 수 있었고 모든 곳이 잘 정돈되어 있었다.

얼빠져 계시던 엄마도 호주에 도착하니 신이 나서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날씨가 정말 끝내줬다.

이런 날엔 유튜브를 못 봐도, 친구들을 못 만난다고 해도 우울할 수가 없다. 무조건 행복해야만 하는 날이었다.

엄마는 졸리다며 길 가다가 아무 커피숍에 들러 커피를 세 번이나 드셨다.

그리곤 어딜 가든 커피가 너무 맛있다며 어린아이처럼 좋아하셨다.

나는 엄마에게

"아빠도 없으니까 엄마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라고 큰소리를 쳤다.

엄마는 꿀 떨어지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시더니 그 뒤로 좋아서 여기저기 깡충깡충 뛰어다니셨다. 엄마는 꼭 처음 성 밖을 나온 라푼젤 같았다. 맛있는 커피의 힘이란 저런 건가.  

엄마는 테라스에 앉아 나를 바라보며 너무 행복하다고 하셨다. 엄마에게서 '너무 행복하다'는 말을 처음 들은 나는 깜짝 놀랐다. 엄마는 늘 '혼자 있고 싶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런 엄마에게서 행복이라는 단어는 낯설었다. 하지만 엄마가 기뻐하시니 나도 기뻤다. 우리는 둘이서 마냥 깡충거리며 멜버른 시내를 신나게 뛰어다녔다. 엄마는 와인 마실 때만 나와 함께 춤을 추곤 하셨는데 오늘은 커피에 취했는지 맨 정신에도 나와 함께 춤을 추셨다. 역시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인가 보다.

아빠 생각이 잠깐 나긴 했지만 한국 가고 싶지 않아 졌다. 여기 호주는 무조건 행복한 곳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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