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살 쇼니의 호주 한 달 살기- 멜버른 Meriton 수영장
엄마는 비 오는 날을 좋아한다. 비가 오면 꼭 공원에 산책 가곤 하셨는데 비가 오는 날의 한적함과 나무 냄새가 참 좋다고 하셨다. 창 밖으로 하염없이 비 구경하는 것도 좋다고 하셨다.
비 오는 날 자꾸 밖에 나가는 엄마한테 아빠는 아얘 머리에 꽃을 사서 머리에 꽂고 다니라고 하셨다. 엄마가 꽃을 참 좋아하시긴 하지만 왜 비 오는 날만 아빠는 엄마에게 꽃을 사라고 하는지는 영 모르겠다. 엄마는 아랑곳하지 않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직접 꽃을 사긴 했지만 머리에 장식하고 다니진 않으셨다.
한국에서 비 오는 어느 날이었다. 엄마는 비가 오니 둘이서 같이 예술의 전당에 가자고 하셨다. 카페에 앉아 밖을 구경하는데 부슬부슬 내리던 비가 어느덧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너무 세차게 내렸다. 나는 저 비를 뚫고 집에 어떻게 가지? 너무 걱정이 됐는데 엄마는 그때도 꺅 소리를 지르며 창 밖을 하염없이 바라보셨다. 엄마는 곧 비가 그치고 약속의 무지개가 뜰 거라고 걱정 말라고 하셨다. 하지만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도 비는 더 세차게 내렸다. 결국 더 늦어지기 전에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돌아가는 길 버스가 괴물같이 크앙하면서 엄마에게 흙탕물 파도를 머리 위부터 발끝까지 내뿜었다. 다행히 무지개가 그려져 있는 우비를 입고 엄마 뒤에 숨어 있던 나는 괜찮았지만 엄마는 쫄딱 젖었다. 약속의 무지개는 나한테만 떴다. 그래도 엄마는 비 오는 날을 좋아했다.
오늘 멜버른에도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여기 멜버른 날씨는 엄마의 마음처럼 왔다 갔다 뒤죽박죽이다. 어제는 37도까지 올라가 더워서 걷기도 힘들었는데 오늘은 최고기온이 21도로 쌀쌀하다. 엄마는 당장이라도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우산이 하나뿐인 우리는 비가 그칠 때까지 수영장에서 놀기로 했다.
엄마는 중학교 때 수영장이 있는 학교를 다니셨다고 한다. 체육시간에 1학년은 자유형, 2학년은 배영, 3학년은 접영을 배우고 중간고사 기말고사 시험도 수영으로 봤다고 했다. 엄마는 2학년때만 수업을 열심히 들어서 배영만 할 수 있다고 하셨다. 1학년때는 남학생들과 같이 수영복을 입고 수업하는 게 너무 부끄러워서 맨날 양호실에 숨어있었고, 3학년때는 어떤 개구쟁이 오빠가 맨날 커다란 코딱지를 수영장에 몰래 묻히는 걸 보고 절대 물에 안 들어갔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빠가 여느 때처럼 코딱지를 은밀하게 수영장 안에 묻히다가 선생님께 걸려 뜰채로 코딱지 10개를 뜨는 벌을 받고 나서도 엄마는 절대 들어가지 않았다고 한다. 선생님한테 매를 맞는 한이 있어도 말이다. 어쨌든 엄마는 배영은 '수'를 받고 자유형과 접영은 '양'을 받았다고 하셨다.
그래서 엄마는 수영장에서 하루 종일 둥둥둥 떠다니기만 한다. 엄마는 내가 깊은 곳에 들어가 나를 데리러 와야 할 때도, 내가 물속에 물안경을 떨어트렸을 때도 "기다려" 말씀하시곤 누워서 전속력으로 오신다. 아빠는 그런 엄마를 보고 맨날 어떻게 배영만 하냐며 비웃곤 했다. 아빠는 물속에서 뜨지도 못하면서.
여기 호주 사람들은 엄마의 두 배가 되는 가슴과 엉덩이를 가지고 있으면서 실오라기 같은 아주 얇은 수영복을 입고도 참 수영을 잘했다. 물개처럼 수영장을 휘젓는 사람들 사이에서 엄마는 꼭 인간 레일처럼 지지 않고 반듯하게 누워 둥둥 떠다니셨다.
나는 엄마 딸답게 배영부터 수영을 시작했다. 사실 자유형을 배우고 싶었는데 엄마가 하실 줄 아는 게 배영뿐이라 어쩔 수 없었다. 엄마는 유튜브로 자유형을 익히고 나에게 가르쳐 주려 하셨지만 앞으로만 돌아서면 꼬르륵 빠져 아주 못 생긴 표정으로 개헤엄을 치곤 했다. 엄마는 누워서는 고개도 360도 돌릴 수 있고 수달처럼 조개를 까먹으라 해도 까먹을 수 있다고 하셨지만 몸을 앞으로 돌리면 영 바보천치같이 모양 빠지는 행동을 했다. 아무래도 자유형은 내가 엄마를 가르쳐주는게 빠를 것 같아 내가 유튜브를 보며 연습했다. 다행히
열 번 정도 숨을 쉬고 자유형으로 앞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 엄마는 여전히 누워서 나를 부지런히 쫓아오고 계시지만.
수영장 옆에는 스파도 있다. 스파 밖에 있는 스타트 버튼을 누르면 거대한 물줄기들과 함께 거품으로 가득해진다. 이곳은 굉장히 따뜻한데 엄마는 꼭 여기 들어가 '아이고 시원하다'며 거품 마사지를 받으시곤 했다.
엄마의 수영복은 안에 봉긋한 스펀지가 들어있었는데 스파 마사지 버튼을 누르면 이내 스펀지가 커다랗게 부풀어 올랐다. 엄마는 스펀지가 커다랗게 부푸는 걸 즐기는 듯 보였다. 스펀지가 크게 부풀수록 엄마의 어깨도 펴졌다. 엄마는 옆에 사람을 흘긋 쳐다보고는 이내 "아 현실도 이랬으면 좋겠다"라고 말씀하셨다.
오늘 아침 스파에는 아무도 없었다. 사람이 없으니 엄마의 어깨는 더욱 당당해졌다. 엄마는 마사지를 가장 세게 틀고 시원한 물줄기를 즐겼다. 엄청난 수압에 엄마의 스펀지도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다. 구명조끼 입은 것처럼 엄마 몸이 곧 두둥실 떠오를 것 같았다. 난 엄마의 그 모습이 너무 웃겨 깔깔거렸다. 하지만 엄마는 아랑곳 않고 마사지에 심취해 계셨다. 이내 엄마는 마사지를 더 세게 올렸고 무아지경 상태에 빠지셨다.
엄마는 다른 사람이 온 지도 모르는 듯했다. 밖에 있던 나는 다른 사람들을 생각해 마사지를 다시 약하게 줄이고 스파로 들어갔다. 그런데 스파에서 엄마의 스펀지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외국인들은 '웁스?' 어깨를 으쓱하며 둥둥 떠다디는 스펀지를 가리켰지만 엄마는 모르는 듯했다.
나는 서둘러 떠다니는 스펀지 두 개를 주었다.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스펀지는 엄마가 주무실 때만 뺐던 게 기억이 났다.
"엄마, 여기서 자려고?"
난 수영장에만 오면 둥둥 떠다니며 스파에서 나올 생각 없는 엄마가 아얘 여기서 주무시려나 보다 생각했다.
엄마는 마사지 소리에 안 들렸는지 큰 소리로 "뭐?"라고 되물으셨다. 그래서 난 더 큰 소리로 스펀지를 흔들며 말했다.
"엄마, 여기서 잘! 거! 냐! 고! 이거! 엄마! 잘 때만! 빼는 거잖아! 여기서 진짜 잘 거야? 집에 안 가?"
외국인 두 명이 나와 엄마를 번갈아 쳐다봤다.
엄마는 멍하니 아래를 쳐다보시곤 되려 나에게 소리를 지르셨다.
"악, 그게 뭐야! 너 그거 당장 가지고 와!"
제멋대로 떠다니는 걸 기껏 주웠더니 엄마는 내게 화를 냈다.
엄마는 서둘러 밖에 나가 수건으로 몸과 스펀지를 감싼 채 그 길로 숙소를 향해 돌아갔다.
외국인들이 날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영문 모르겠는 나도 같이 어깨를 으쓱하며 엄마를 따라 나왔다.
역시 엄마랑 둘이 여행을 가는 건 내 손해였다. 엄마 회사 사람들은 엄마를 '차가운 도시 여자'라거나 '완벽주의자' '철저한 계획형' 등으로 생각한다지만 엄마는 뭐 하나 완벽한 게 없는 허점투성이었다. 계획이라는 건 질색하고 의자에 물이 흥건해도 모르고 혹은 알면서도 그냥 철퍼덕 앉아버리는 그런 사람이었다. 엄마의 친구들은 엄마와 친해질수록 엄마의 이런 구멍들을 발견하곤 당황하기도 하고, 더 좋아하기도 했지만 아빠만은 아니었다. 엄마 친구들이 엄마는 생긴 거와는 다르게 허점투성이라고 이야기해도 아빠만큼은 절대 아니라고 끝까지 주장하셨다. 아빠는 친구들이 잘 모르는 거라며 엄마는 완벽주의자에 도도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다.
오늘은 멜버른 박물관에 다시 갔다. 엄마는 공짜로 즐길 수 있는 박물관, 도서관, 미술관 중에 하나 선택하라고 했고 나는 박물관을 골랐다. 그런데 박물관을 들어서니 누군가가 막아섰다. 티켓을 끊어야 한다는 거다.
이상하다? 우리 며칠 전에 공짜로 들어갔었는데. 엄마가 직원에게 공짜 아니냐고 물었다. "You must buy a ticket"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다행히 아이는 공짜라고 한다.
엄마는 서둘러 티켓을 끊고 내 손을 잡고 들어갔다. 지난번에 공짜로 들어간 게 들키면 엄마는 잡혀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엄마 손을 놓고 싶었다. 어쨌거나 아이는 공짜니까 나라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왠지 멜버른 박물관은 오늘이 마지막이 될 것 같았다. 나는 가지고 간 스케치북을 꺼내 박물관에서 본 것들을 따라 그리고 생각나는 것들을 적으며 머릿속에 꼭꼭 담았다.
그리곤 생각했다. 이렇게 허점투성인 엄마를 맨날 완벽하다고 하다니 아무래도 아빠는 역시 엄마랑 안 친한 것 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