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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숀앤펀 Feb 09. 2024

오늘도 도서관에 이기러 갑니다

10살 쇼니의 호주 한 달 살기- 멜번 빅토리아 주립 도서관

 도서관 앞에서 한바탕 체스판이 열렸다. 상대는 고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호주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는 이미 앞 경기에서 다른 아저씨를 이기고 올라온 고수였다. 할아버지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나랑 한 판 붙을 사람? 줄 서" 라며 구경하는 사람들을 도발했다. 내 안에서 승부욕이 들끓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나는 고수 분위기가 풍기는 할아버지를 내 상대로 마음속에 점찍어 둔 상태였다. 나는 체스 판 앞에 섰다. 두려울 것이 없었다. 주변엔 수십 명에 사람들이 체스판을 둘러쌓고 구경 중이었다. 엄마는 내가 체스판 앞에 나서자 "괜찮겠어? 정말? 기다렸다가 엄마랑 하자 그냥"이라며 나를 말렸다. 하지만 체스를 나한테 배운 엄마는 내 상대가 못 되었다. 나는 반짝이는 눈빛으로 "응, 엄마 나 꼭 하고 싶어. 나 이기고 올게" 구경꾼들 사이로 앞으로 나갔다. 심장이 콩닥거렸다.


 할아버지는 "Hey Kid!, Come on. Let's do it!" 나를 향해 말씀하셨다. 역시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이다. 드디어 게임이 시작되었다. 할아버지는 거침이 없으셨다. 나는 생각하느라 바쁜데 내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말을 옮기시는 통에 나는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침착하게 하나씩 하나씩 말을 움직였다.

그러다 내가 말을 움직이자 무엇인가 잘못됐는지 할아버지는 계속 "너 그러다 잡혀"라고 말씀하시며 계속 "그렇게 하면 안 될걸?"이라며 나를 겁주었다. 난 곤경에 빠졌다. 수십 개의 눈동자가 흥미진진하다는 듯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엄마에게 도움의 손길을 요청하고 싶었지만 체스를 잘 모르는 엄마는 통역 말고는 별 도움이 안 됐다. 그리고 엄마는 당장이라도 나를 데리고 도망가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그때 마침 지나가던 한국인 가족이 멈춰 서서 나를 쳐다보았다. 딱 봐도 영리해 보이는 오빠들 두 명이 있었다. 한국인 아주머니는 오빠들에게 '너네 체스 잘하잖아. 같이 한번 해봐'라고 이야기했다. 그 소리를 들은 엄마는 다급했는지 오빠들에게 저 할아버지가 계속 곧 잡힐 거라고 얘기하는데 뭘 어떻게 옮기면 될지 좀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오빠들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할아버지의 수를 읽고 내게 어떤 걸 움직이면 되는지 알려주었다. 나는 두 수 정도밖에 생각을 못 했는데 오빠들은 세수, 네 수까지 예상하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그제야 "드디어 나의 상대를 만났군"이라며 자존심 상하는 말씀을 하셨지만 오빠들 덕분에 나도 할아버지 말 여러 개를 쓰러뜨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많이 열세했던 탓에 나는 할아버지한테 결국 킹을 넘겨주고야 말았다.

 '으, 내가 지다니!'

 아쉽지만 괜찮았다. 다음에 이기면 되니까. 난 바로 다시 도전장을 내밀었다. 내가 누군가. 나는 눈이 충혈되어도 게임 만렙 될 때까지 포기를 모르던 집념의 어린이 아니던가.

할아버지는 "Again?" 하며 이내 나를 도발하셨지만 엄마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기회를 줘야 한다고 더는 게임을 해서는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할 수 없이 난 그 길로 도서관 안 미니 체스게임 하는 곳으로 들어가 연습모드에 돌입했다. 그리고 엄마에게 당장 집에 가서 아이패드에 체스를 깔아달라고 부탁드렸다. 오늘부터 멜버른 떠날 때까지 맹연습해서 가기 전에 꼭 할아버지를 이기고 가야지 다짐했다.


 엄마는 모르는 사람과 타지에서 게임에 도전하고 최선을 다하는 내가 정말 멋지다고 칭찬해 주셨다. 엄마라면 엄마가 잘하는 오목이어도 많은 관중 앞에서는 절대 못 했을 거라고 하셨다. 비록 졌지만 잘 싸웠다니 나는 매우 뿌듯했다.

 도서관 앞에서는 어떤 외국인 언니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무슨 노래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언니 덕분에 나 역시 흥이 나고 기분이 좋았다. 엄마에게 내일은 나도 저 앞에서 음악을 틀고 춤을 춰도 되냐고 물어봤다.

엄마는 이번에도 "진짜야? 괜찮겠어?"라며 걱정의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셨다. 나는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당연하지! 나 아이브 음악 틀어줘!"

엄마는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그래. 너 방송댄스 배웠으니 K-Pop의 힘을 보여줘. 대신 엄마는 네 앞에 엄마 모자만 놔두고 멀리 떨어져서 지켜보고 있을게"

눈 부시면 모자를 쓰라고 놔두라는 건가 나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알겠다고 대답했다. 벌써부터 몸이 근질근질한 게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오늘도 도서관에서 책 한 권 안 읽었지만 그림을 그리고 체스를 하며 한 나절을 보냈다. 어느덧 멜버른에 온 지 일주일이 지났다. 이제는 체스도 해야 하고 댄스 연습도 해야 하는데 가야 할 곳은 많고 시간은 왜 이렇게 빠르게 흘러가는지 모르겠다. 물론 엄마는 아직도 일주일밖에 안 지났냐고 뒷목을 잡고 계시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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