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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숀앤펀 Feb 10. 2024

꾀부리다가 한 순간에 새되는 겁니다

10살 쇼니의 호주 한 달 살기

토요일인 오늘은 동네가 한산하다. 우리 숙소는 도심 한가운데에 있는 고층건물이다. 나는 양치질하면서도 밥을 먹으면서도 출퇴근 하는 사람들 지나다니는 걸 구경한다. 호주 사람들은 엄청 부지런한지 새벽부터 돌아다녔다.

여름인 호주는 새벽 6시면 해가 떠서 저녁 9시까지 밝다. 그래도 엄마는 안전을 위해 6시까지는 집에 들어와 저녁을 먹고 약속한 수영을 매일같이 2시간씩 하고 있다.


 난 사실 여기가 제주도든 시드니든 멜버른이든 상관없다. 매일 물놀이만 하면 행복하다. 하지만 엄마는 치사하게 하루 일정을 군말 없이 다 따라다녀야지만 수영장에 갈 수 있게 허락해 주셨다. 

수영장은 튜브를 갖고 갈 수도 없고 나 혼자서 들어가기엔 깊어서 어쩔 수 없이 엄마한테 찰싹 붙어서 놀아야 한다. 이런 거 가지고 매일 협박하니 나로서는 너무하지만 어쩔 수 없다. 


 오늘도 수영을 위해 할 수 없이 엄마가 좋아하는 곳을 따라다녔다. 엄마는 주로 박물관, 도서관, 미술관 등 '관'자로 끝나는 곳을 좋아하신다. 아마도 공짜여서 그런 듯하다.

오늘은 멜버른 박물관에 갔다. 기대 없이 따라갔는데 엄청나게 큰 공룡부터 화산폭발 3D 체험, 수 백가지의 곤충과 파충류들, 실내에 있는 멋진 정글까지 너무 재밌어서 4시간이나 넘게 있었다. 


 박물관을 나와 커다란 공원 놀이터에 들렀다. 한국 놀이터에서는 엄마들이 주로 모여서 이야기 꽃을 피우곤 했는데 이곳은 아빠들이 모여있었다. 어린 동생들을 아기띠 하고 있는 아빠들과 유모차 끌고 있는 아빠들, 아이와 놀아주는 아빠들은 자연스럽게 인사하고 육아이야기들을 나누고 계셨다.

'우리 아빠도 왔으면 좋았을 텐데'

나는 생각했다. 아빠는 어릴 때부터 나를 전담하여 돌봐주셨다. 내가 아플 때나 무슨 일이 있을 땐 아빠가 항상 휴가를 냈다. 엄마 회사는 늘 바쁘고 휴가 내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그래도 괜찮았다. 아빠가 더 잘 놀아주고 세밀하게 나를 돌봐주시기 때문이다. 비록 잔소리는 엄청 심하지만.

 한국에서 아빠는 놀이터에서 단연 인기 최고였다.  아빠는 5-6명의 엄마들 사이에서도 기죽지 않고 대화를 주도했고 먼저 '누구 엄마'하며 친근하게 인사를 건네곤 했다. 친구들은 아빠가 태워주는 관람차를 타기 위해 줄을 섰고 난 그런 아빠가 자랑스러웠다. 아빠는 어느 순간 놀이터의 대장이 되어있었다.  

 사람들은 아빠의 직업에 대해 궁금해했다. 한 번은 아빠가 동물병원 의사라고 소문이 났다. 왜 그런지는 도통 모르겠지만 우리 아빠는 털 알레르기가 있어 동물 근처에도 안 간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어떤 친구는 우리 아빠가 백수냐고 물어봤다. 백수의 뜻을 몰랐던 나는 백 살까지 사는 사람인가 보다 아는 척하고 싶어 그렇다고 했다. 그 뒤로 동네사람들은 아빠에게 판촉물로 받은 수세미도 갖다주고 행주도 주면서 여러 가지 살림팁을 공유해 주었다. 

아빠가 지금 놀이터에 같이 계셨다면 아마 여기서도 대장이 되어있을거다. 비록 영어는 못 해도 손짓 발짓 아무말이라도 아빠는 어떻게든 표현하는 분이셨다. 하와이 여행 때 엄마는 그런 아빠를 자주 모른척 하셨지만 말이다. 

 

 오늘 멜버른 날씨는 아침은 13도로 쌀쌀하더니 낮에는 31도까지 올라가 너무 더웠다. 한참을 뛰어노느라 얼굴이 벌게진 나는 벤치에 앉아 쉬고 싶었다. 엄마는 호주 사람들처럼 아무 데서나 누워서 쉬라고 말씀하셨다. 그래놓고 엄마는 계속 벤치에 앉아 계셨다. 아무래도 잔디에 새똥들이 엄청 많을 것 같다고 말이다. 벌러덩 누웠던 나는 당장 용수철처럼 튀어 일어나 엄마에게 화를 냈다. 엄마는 벤치에 앉을 거면서 나는 새똥 위에 누우라니 정말 너무하다고 생각했다.

 난 화가 나서 엄마도 잔디에 앉으라고 떼를 썼고 엄마는 하는 수 없이 알겠다고 하셨다. 그리곤 최대한 새똥이 없어 보이는 잔디를 찾아 10분 정도를 헤맸다. 내가 봤을 땐 거기서 거기였는데 엄마는 한참을 살펴보더니 어느 곳에 도달해 "에잇"하고 철퍼덕 앉아버렸다.  기합소리가 꼭 '새똥아 사라져라' 하는 마법의 주문 같았다.


 나도 엄마 옆에 따라 앉았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새들이 한 두 마리 모이더니 어느새 열 마리 정도가 우리 주위를 둘러쌓고 있었다. 그중 대장으로 보이는 새 한 마리가 잔디밭을 콕콕 파더니 기다란 지렁이 한 마리를 낚아 올렸다. 그러자 모든 새가 부리를 콕콕 쪼기 시작하더니 이내 지렁이 한 마리씩 낚아 올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누구 주둥이에 있는 지렁이가 더 긴지 시합하는 것처럼 지렁이를 물고 흔들며 서로 견제했다. 지렁이들은 처절하게 몸부림치고 있었다.  

"아아아아아아아악!!!!!!!!" 

 엄마가 심혈을 기울여 찾은 곳은 지렁이 노다지 밭이었다. 난 내가 달릴 수 있는 곳까지 끝까지 죽을힘을 다해 달려갔다. 숨이 턱끝까지 차올랐다. 뒤에서 새들이 지렁이를 물고 꼭 나를 따라올 것만 같았다.

엄마의 비명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엄마는 한순간에 새됐... 아니 새들에 포위당한 상태였다. 내가 기겁하고 뛰는 바람에 들고 있던 과자를 놓친 게 화근이었다. 바닥에 흩뿌려진 과자를 먹으려고 멀리서 비둘기, 갈매기, 오리부터 정체를 알 수 없는 다양한 새들까지 스무 마리 남짓 보였다. 지렁이에 과자에 그곳은 새들의 뷔페가 되었고 그 센터에 엄마가 있었다.

혼비백산이 된 엄마는 도와달라고 소리를 지르며 일어나려고 애썼지만 무거운 가방을 메고 있던 탓에 뒤로 발라당 넘어져버렸다. 역시 공원은 누워서 즐겨야 제맛이었던 거다.  

나의 비명소리와 엄마의 비명소리에 이제 공원사람들은 다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엄마의 몸부림을 깔깔 거리며 다들 즐기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유튜브에 올리려는지 엄마를 촬영하고 있었지만 엄마는 그런 건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엄마는 똥 싼 것처럼 청바지가 흥건히 진흙으로 젖은 후에야 그곳을 탈출할 수 있었다.  나는 새똥 피하려다 엄마가 바지에 똥 싼 거 아니냐고 엄마를 놀려댔다. 정말이지 너무 웃어서 오줌 쌀 뻔했다. 


 자기 전 엄마가 오늘 제일 기억에 남는 일에 대해 물으셨다. 박물관부터 놀이터, 수영장까지 너무너무 재미있는 하루였다. 그래도 단연 엄마 새똥 사건이 최고였다고 나는 대답했다. 평생 잊혀지지 않을 만큼 너무 웃겼고 '쌤통이다'라는 뜻을 오늘 엄마 덕분에 배우게 됐기 때문이다.  


하루의 여운이 가시질 않는지 잠이 오질 않았다. 난 이불속에서 히죽히죽 웃으며 내일을 기다렸다.  


#호주 #아이와 #한달살기 #멜버른박물관 #공원 #멜버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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