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그림에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별 결과물 없이 20대 중후반 평범한 직장인이 되었습니다. 처음엔 몸이 고되었지만 적응하고 나니 조직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았어요. 대부분의 시간을 직장에 할애하고 긴 출퇴근 시간을 쓰고 나면 하루는 금방 갔어요. 여차저차 직장 생활 3년째에 접어들자 사춘기 때도 겪지 않았던 나란 누구인가..로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라는 인간은 도통 모르겠고 시간 낭비하는 것 같아 마음만 조급해지는 시기였지만 솔직히 안정된 생활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도 없었지요.
그 해 겨울 할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셨어요. 처음 겪는 가족의 죽음에 당황했나 봅니다. 마음을 표현하는 살가운 분은 아니셨지만 초여름엔 큰 잎사귀에 산딸기를 싸서 안겨주셨고 만날 때마다 새우깡 한 봉지라도 꼭 선물해주시고는 했어요. 이런 기억들 때문인지 한참을 힘들어했어요. 모든 게 다 시들하고 관심이 없어진 것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문득 이 좋은 나이에 지금처럼 살면 안 된다는 생각이 마음을 뒤흔들었습니다. 삶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으니까요. 나에게만이라도 특별한 자신이 되고 싶은 마음이 점차 커져갔어요. 온전한 내가 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다가 하고 싶은 일을 더 이상 미루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래, 그림이야!'
평소 꽃도 그려보고 잡지 속 인물들도 끄적거려 보았지만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계속 남아있었어요. 한 마디씩 툭툭 던져놓고 제대로 된 대화는 해 본 적이 없었던 거죠. 그래서 이번엔 진심을 담아보기로 했습니다. 곧 그림 수업을 신청했어요. 이런 일이 뭐 그리 대수인가 싶지만 그때의 나에게는 큰 도전이었습니다. 그동안 먹고사는 문제 말고는 뭘 제대로 해본 적인 별로 없었거든요.
기초부터 꼼꼼히 가르쳐주는 연필화 수업은 초짜에겐 최상의 맞춤 교육이었습니다. 옷과 화장품을 사는 대신 연필과 지우개를 한 상자씩이나 사고 트레이싱지, 스케치북, 아트백을 사는 과정이 전부 신세계였어요. 첫 시간은 선긋기. 예전에 어떤 친구가 끊임없이 신문지에 선을 그어대는 모습을 보며 저게 뭐 하는 쓸데없는 짓인가 생각했었는데... 진지하게 선을 똑바로 그으려고 노력하는 내 모습이 참 우스우면서도 대견했어요. 초보자답게 조금 긴장한 모습이었을 테지요. 꾀부리지 않고 열심히 그림을 그렸을 그때의 내가 그리워질 때도 있어요.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수업날을 중심으로 일상이 돌아갔어요. 동아리라는 이름으로 운영되는 곳이었지만 그림을 제대로 배우려면 일주일 동안 그려나가야 할 숙제가 만만치 않았어요. 수업을 앞에 두고 있던 주말은 그 숙제를 해결하느라 금세 지나가버렸거든요. 다음 수업을 위해 연필 한 다스를 뾰족하게 깎아두고 손톱 밑 때가 신경 쓰일까 봐 손톱 깎기도 잊지 않았어요. 큰일이 아니면 결석 같은 건 생각도 하지 않았답니다. 비록 그림 초보였어도 점차 나아질 거라는 기대를 가질 수 있었던 그때의 제가 참 기특하고 어여쁘게 여겨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