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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새 Jan 22. 2024

4. 치유의 그림

나의 첫 그림 선생님


그림 그리기는 계속되었습니다. 긴 출퇴근 시간으로 여유가 없는 날들이었지만 새벽시간을 이용해서라도 그림을 그리려고 노력했어요.


그림 그리기를 하다 보면 단순한 취미의 즐거움을 넘어서 자연스럽게 빠져드는 몰입을 경험하게 됩니다. 대상을 관심을 가지고 관찰하다 보면 그 특징이나 복잡함을 단순함으로 표현할 수 있는 이해력이 생기더라고요. 그 과정에서 오만가지 생각들은 수없이 반복되는 선긋기와 붓질로 점차 사라지고 오로지 그리는 행위 그 자체에만 집중하게 됩니다. 모든 감정들을 그림 속에 꾹꾹 밀어놓고는 다소 경쾌하고 가벼워진 나를 보게 되지요.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되자 일상의 스트레스가 쌓여갈수록 그림 그리는 시간을 만들려고 더 노력했고 그 시간을 순수하게 즐기게 되었답니다. 특히 그 대상이 인물이라면 그리는 과정에서 그의 개성과 나의 감정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그를 더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되고 동시에 그런 과정을 즐기는 나 자신까지도 좋아졌어요.


그런데 연필화 마무리를 아버지 초상으로 정했다가 심적 갈등이 있었습니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좋진 않았거든요. 힘들게 연필화를 끝내놓고 또다시 수채 인물화로 한 번 더 선택했어요. 풀지 못한 숙제를 다시 들여다보는 심정으로, 아버지라는 대상을 긍정적으로 풀어내고 싶은 마음으로 시작했어요. 그림을 그려나가는 과정은 자신과의 지루한 싸움이었습니다.  내가 바라보는 아버지의 고집스러움이 전혀 그림에 나타나지 않아 거짓을 그리고 있는 것 같았어요.  이런 마음을 계속 품고 있는 어리석음도 싫어졌어요.  아버지에 대한 원망스러움과 나에 대한 실망으로 그림은 결국 중단되었습니다.


한참 후에 문제의 그림과 다시 마주했습니다. 오랜 시간 그저 그림을 바라보았던 것 같아요. 찬찬히 보니 그림에 뭔가가 빠져있었어요. 인물화를 그릴 때는 대체로 배경을 그리지 않았는데 이번엔 뭔가 다른 걸 채워 넣고 싶었습니다. 왜  필요했던 걸까요. 그림과 내 마음이 전혀 맞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이 따뜻한 인상의 그림과 맞는 내 마음을 찾고 싶었어요. 현재의 불안한 감정이 아닌  따뜻했던 기억 속의 아버지를 말이지요. 그리고 어릴 적 겪었던 일을 끄집어내어 그림 속에 글로 옮겼습니다. 그림 양옆으로 삐뚤빼뚤 글씨를 새겨 넣으면서 그때서야 마법처럼 마음이 누그러지기 시작했어요. 그 기억이 나를 살포시 안아주는 것 같았어요. 조금은 아버지를 이해할 것도 같고 아버지가 아닌 나 자신에 대한 미움을 비워낼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를 그리면서 거칠었던 내 마음이 조금씩 정화되어 가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어요 언제고 또다시 마음이 흔들리며 불안하게 둥둥 떠다닐지도 모르겠지만 그때가 오면 그냥 한번 안아주고 싶습니다. 또 나쁜 감정들이 떠올랐구나. 감정을 느끼는 건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계속 그 안에 나를 가두는 것은 좋지 않겠지요. 다른 곳으로 향하는 문을 열고 나오고 싶어요. 그리고는 나에게 어여쁜 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아버지(나의 첫 그림 선생님께)


어린 꼬마는 아빠가 무섭지만 용기를 내어봅니다.

아빠 사슴 그려주세요.

옆집 아저씨와 이야기를 나누던 아빠는 이쪽은 보지도 않고

어린 딸에게서 누런 갱지와 몽당연필을 받아 듭니다.

아빠의 손은 쓱쓱 빠르게 지나갑니다.

꼬마 눈엔 우리 아빠만큼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순식간에 마법처럼 나타난 사슴이 마냥 신기합니다.

그림 속 사슴이 머리를 돌려 자기와 눈을 마주칠 것 같고

금방이라도 발아래서 풀꽃이 돋아날 것 같습니다.

꼬마는 용기를 낸 자신이 대견합니다.

그리고는 작은 소리로 속삭입니다.

아빠, 고맙습니다.


나의 첫 그림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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