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아침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지난번에 먹었던 바게트 샌드위치를 사러 가는 길, 한 번 가본 길이기도 하고, 이곳에서 머문 날이 쌓여 가니 마음의 여유도 생겨 혼자 나선 길이다. 카페에는 출근 복장을 한 사람들로 북적인다. 꽤 바쁘게 돌아가는 카페에서 나 혼자 여유롭게 빵을 사는 기분이 좋다. 퇴직한 지 3년째인데 아직도 이 여유로움이 좋은 것을 보면 내 한끝은 아직도 직장생활에 닿아 있나 보다. 하긴 34년이나 그렇게 살았으니.....
라운지에서 뽑아온 코르타도와 어제 시장에서 구입한 초리조를 곁들였다. 담백하면서도 매콤한 초리조가 반찬 역할을 훌륭하게 해 주어 흐뭇했다.
둘. 피카소 미술관 – 푸른빛에 반하다
피카소 미술관의 입구는 좁은 길목 안쪽에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인가, 제법 규모가 큰 미술관인데도 아늑한 느낌이 든다.
피카소 미술관에는 작가의 이름을 건 미술관인 만큼 피카소 특유의 추상화와 더불어 어렸을 때부터 그린 다양한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그중 내 맘이 끌렸던 것은 푸른빛의 그림이다. 피카소가 친구 카사헤마스의 죽음으로 인한 우울함을 푸른색으로 표현한 청색시대에 그린 그림이다. 피카소의 푸른색은 깊은 감정이 묻어나는 짙은 푸른색이다. 그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푸른 유리컵에 붉은 꽃과 푸른 꽃을 그린 le verre bleu였다. 진하고 깊이 있는 색감에 반해 엽서를 구입하여 책갈피로 쓰고 있다.
피카소 미술관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시녀들’이다.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을 큐비즘으로 그려낸 회색톤의 그림은 중후하면서도 은은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이웃한 방에는 시녀들의 부분 부분을 그린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림 속에서 공주와 시녀는 각기 다른 표정과 포즈를 취하고 있으며 색감도 다양하게 표현되어 있다. 시녀들을 완성하기 위해 수없이 고민한 흔적을 담고 있는 그 작품에서 새삼 피카소의 노력이 보여 감탄을 자아낸다. 천재는 그냥 되는 것이 아닌가 보다.
피카소의 ‘비둘기’ 연작이 있는 방은 피카소의 그림인가 싶게 밝고 편안한 분위기이다. 피카소가 남프랑스에서 마지막 부인인 자클로로크와 함께 하였던, 그의 가장 평화로운 시절에 그린 그림이라는 것이 충분히 이해가 된다. 밝은 색감과 평화로운 분위기가 마음에 든다. 내가 좋아하는 피카소의 그림이 될 것 같다. 그곳에서 그 분위기에 잘 맞는 두 할머니를 만났다. 친구인 듯한 두 할머니는 비둘기 그림 앞에서 서로 사진을 찍어주기도 하며, 지팡이처럼 생긴 의자를 펼치고 앉아 한참을 그림을 감상하기도 하였다. 그 두 할머니의 모습이 그림 속 비둘기처럼 정겹고 평화로워 보였다. 피카소의 비둘기 그림을 배경으로 한 또 하나의 그림을 연출해 준 할머니들이 인상 깊게 남아 있다.
피카소 미술관을 거닐다 보면 미술관도 진화한다는 생각이 든다. 예전과 달리 곳곳에 영상실이 있어서 피카소의 생각, 피카소의 그림에 대한 이야기들이 곁들여진다. 적절한 공간에 과하지 않게 제공되는 영상은 괜찮다.
셋, 거리에서
카페를 찾아 고딕지구로 다시 왔다. 햇볕 받은 나무가 아름답다. 그 아래로 걸어가는 딸아이의 모습도 예쁘다. 천천히 뒤따라 가면서 자꾸만 사진을 찍게 된다.
간판이 마음에 드는 카페에 앉아 아이스 카페라테를 마셨다. 주인장인 부부의 모습이 정겨워 보이는 카페다. 조용하고 한적한 데다 카페지기가 만들어내는 아늑한 분위기에 한참을 머물렀다.
카페를 나와 골목을 걸어 나오는데 뒤에서 카페지기가 우리를 불렀다. 무엇을 놓고 왔나 싶었는데 이곳엔 자전거 타고 가면서 핸드폰을 채가는 경우가 많으니 조심하라는 이야기를 전한다. 우리가 핸드폰을 허룩하게 쥐고 가는 것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나 보다. 그 염려가 고맙다.
개선문 광장에 다시 왔다. 수아는 공원으로 갔고 나는 광장을 선택했다.
야자수 물들어가는 광장에서,
플라타너스 그늘 드리운 광장에서,
플나타너스 바람에 나부끼는 광장에서,
사람들이 흘러가고 흘러오는 광장에서,
각자의 모습으로 걸어가는 그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
사진도 찍고, 잠시 멈추기도 하고, 깔깔깔 웃음도 날리는 그 평화로운 모습 지켜보면서 어쩌면 삶은 생각보다 쉬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페로 둘러싸인 레이알 광장은 조그맣지만 화사하다. 카페에 자리 잡고 앉아 광장에서 진행되는 아크로바틱 공연을 보았다. 꽤 고난도의 기술도 흥미롭지만 관객과 소통하며 만들어내는 유쾌한 분위기가 좋다.
열일하던 카페 사장님이 어디서 왔느냐고 말을 걸어온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딸이 한국에서 2년 정도 유학 생활을 했다고 반가워하며 상그리아 한 잔을 서비스해 주었다. 그 달콤한 맛에, 그 따뜻한 마음에 취해 맘껏 마셨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보며 걱정해 주는 사장님의 스위트함에 훈훈하게 기분 좋게 머물 수 있었다. 마음에 남는 여행, 사람이 답이다.
과일과 음식을 주로 파는 라보케리아 시장은 플레이팅이 매우 유혹적이다. 과일가게는 흡사 꽃밭을 보는 듯하고 엠파나다 등의 먹거리도 저게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예쁘게 쌓아 놓았다. 사고 싶은 마음이 마구 솟아나게 하는 플레이팅이다. 엠파나다를 하나 사서 먹어보니 우리의 군만두 비슷한 느낌이다. 재밌다. 시장을 거닐다 보면 곳곳에서 한국말로 부르기도 한다. 한국을 아느냐고 물으면 잘 모른단다. 관광객들이 많으니 한두 마디 배우게 되었다고.
넷. 음식이 문화다.
블라이 핀 초거리에 있는 핫한 핀쵸집 퀴메퀴메를 찾았다. 신선한 재료와 색다른 핀쵸로 현지에서도 인기가 좋은 핀초가게란다. 5시쯤 도착했는데 그 명성만큼 웨이팅 줄이 길다.
기다리는 사람 중에 아기를 데리고 온 젊은 부부가 있다. 인형 같은 아기의 모습에 저절로 시선이 간다. 눈이 마주친 김에 '까꿍' 하니 아기가 까르르 웃는다. 옆에서 지켜보던 부모도 덩달아 웃고.... 까꿍은 아무래도 만국 공통어인 듯하다.
기다리는 사람들 속에서 영어가 많이 들려온다. 그러고 보면 바르셀로나를 여행하는 동안 영어를 꽤 많이 들은 느낌이다. 관광객이 그만큼 많은 걸까? 아님 글로벌 시대의 국제도시의 모습일까?
40분 정도를 웨이팅 하여 들어간 퀴메퀴메는 테이블만 있고 의자는 없다. 다들 서서 핀초와 음료를 즐긴다. 좁은 공간에 많은 사람이 자리하고 있으니 시끌벅적 왁자한 분위기인데 사람들의 모습이 즐거워 보여서인가 오히려 유쾌하게 느껴진다. 주문을 받고 그 자리에서 주문과 더불어 바로 만들어주는 셰프들의 모습도 유쾌하다
핀초 다섯 개와 클라라를 주문했다. 신선한 가리비, 새우, 육포, 버섯 등. 풍미 가득한 신선한 통조림을 이용한다기에 그건 역설적이라 했는데 입안에 신선하게 퍼지는 맛이 놀랍다. 거기에 바삭함이 곁들여져 음식의 맛이 풍부하다. 서서 먹는데 왁자지껄 유쾌한 분위기에 웃음이 절로 난다. 이 분위기, 이 맛이 참 좋다. 이번 여행에서 딸아이가 주는 색다른 경험은 음식이 문화라는 것. 음식을 먹으며 스페인 사람들의 생활 문화를 이해하게 된다.
“나랑 하는 여행 어때? 특별하지?”
웃음 가득한 얼굴로 딸아이가 한껏 생색을 낸다.
“느낄 줄 아는 엄마도 괜찮지 않아?”
상기된 얼굴로 나도 한껏 생색을 내고...
즐거운 저녁 식사가 인상적인 여행지로 남았다.
또 다른 핀초가게 핀초제이로 갔다. 핀초가게가 즐비한 곳에 있어 골목 가득 펼쳐놓은 테라스의 분위기가 좋다. 이곳은 진열된 핀초를 골라 먹는 시스템이다. 진열장에 있는 핀초는 화려하기 그지없다. 그중 세 가지 핀초를 골라서 먹는데 배가 부른 터라 맛은 조금 덜하다. 사람들은 조그만 핀초를 안주삼아 즐겁게 술을 마시고 있다. 조각요리인 핀초를 곁들여 맥주. 또는 와인을 마시는 것이 이 나라 사람들이 술을 즐기는 또 하나의 방식이다. 스페인은 술과 밤 문화를 즐기는 나라인데 우리는 술을 잘 마시지 못하므로 이들의 문화를 온전히 느끼지 못하는 거라고 딸아이는 아쉬워하지만 나는 이 정도면 충분하단 생각이 든다. 저녁마다 특별한 음식에 곁들인 클라라만으로 충분히 취하고 있으니..... 저녁마다 흔들리며 집으로 돌아가고 있으니.......
내일은 리스본으로 떠난다. 리스본과 포르투 여행 후 다시 바르셀로나로 돌아와 귀국하는 여정이다. 1주일을 머물러서인가, 바르셀로나에 다시 돌아오게 된다는 것이 반갑게 느껴지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