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야기를 담은 책을 좋아한다. 화가의 삶에 대한 이야기, 그림에 얽힌 이야기와 그에 대한 감상을 쓴 책들을 읽으면 미술관을 거니는 듯하다. 독서하면서 깊이 있는 그림 감상을 할 수 있어서 즐겨 읽는 분야이다.
언니네 미술관 역시 그러한 기대감을 안고 시작했는데 좀 달랐다. 그림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시작하지만 문학도 영화도 철학도 들어 있고 그 안에 작가의 생각도 깊이 개입된다. 이 책에서는 그림보다 작가의 생각을 많이 읽었다. 그러나 거슬리지 않았다.
'근육, 마녀, 거울, 슬픔, 서투름, 사소함 익숙함 하찮음, 직선과 곡선, 앞과 뒤, 너와 나'라는 9개의 키워드를 정하고 그에 관한 이야기를 전개해 가는 방식도 독특하다. 참신하다. 작가의 시선으로 쓴 글을 통해 이 단어들의 의미가 새롭고 깊어지는 느낌이다.
ㅡ 거울 ㅡ
- (87쪽) 거울을 보는 마음은 사실 365일 모두 조금씩 다르겠지만, 나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앞에서 내가 조금씩 침잠하는 분명한 방향성을 느낀다. 예전에는 주로 점검하듯이 거울을 보았다. 자주, 빠르게 훑듯이. 다른 사람이 내 모습을 어떻게 볼지, 대체로 나를 타인의 시선으로 바라봤다. 지금은 거울 앞에 서는 횟수는 줄어들었지만 나이 든 나를 좀 더 천천히 바라보는 편이다. 내 모습이 스스로 낯설기 때문에 오롯이 내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자기 검열의 방식에서 자아 성찰의 자아 성찰이라는 근지러운 표현을 썼지만 사실 성찰까지는 아니고, 그저 담백한 '나와의 조우'에 가깝다. '어떻게 보이려나'에서 '이게 나구나'로 바뀌었다고 하면 적절하겠다. 물론 다시 '이게 나구나’에서 ‘어떻게 보이려나'로 가기도 한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이 들어가는 내 모습이 낯설고 그 몸과 화해해야 한다는 숙제를 받은 기분으로 거울을 본다.
예전의 내가 보았던 거울이 반사하는 물건이었다면 지금 내가 보는 거울은 반영하는 물건에 가깝다. 아마 시간이 더 지나면 수렴하는 물건이 될 것이다. 이런 변화는 시간이 마음을 고이게 하기 때문이다. 반사와 반영은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그 사이에 시간의 웅덩이가 있다. 시간이 모여 그림자를 만들어낸 것이 반영이고, 수렴은 그 그림자들이 모여 향하게 되는 지점이다. -
거울이 반영이고 수렴이라는 말이 와닿았다. 거울에 시간이 반영되어 있다는 말도. 그것이 마음에 들어 이 글의 출처인 김소연의 ’마음사전‘을 찾아 읽고 있다. 그동안 나는 어떤 마음으로 거울을 보았지? 때때로 다르겠지만 거의 타인의 시선으로 보지 않았을까 싶다. 이제는 시간이 만들어낸 나의 그림자를 찾는 노력을 해야 할 거 같다. 거울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발견한 나의 습관 하나가 있다. 나는 거울 속의 나를 마주하면 나를 향해 웃어준다. 거울 속에서 웃고 있는 나를 보면 마음이 밝아진다.
ㅡ 슬픔 ㅡ
'슬픔'을 읽으면서 나의 감정적 변화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나이 들면서 눈물이 많아지고 감정이 깊어지는 것이 이렇게 아름다운 일이었다니.
- (137쪽) 사랑하는 것들이 생기고 관계가 넓어질수록 슬픔은 말없이 무성해진다. 어른의 세상에는 기본적으로 슬픔이 많다. 엄마가 되어보니 더 그렇다. 지극히 사랑하는 것이 생겨버렸기 때문이다.' 내 아이가 예쁘다 보니 다른 아이도 예쁘고, 아이들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작고 연약한 것들이 눈에 보인다. (중략) 사랑을 느끼는 영역이 넓어지다 보니 생명 있는 것뿐 아니라 세상 만물을 느끼는 온도가 달라진다. 겨울에 차가운 눈을 이고 있는 자전거도 추워 보이고, 목에 늘 전선을 감고 사는 전신주도 안쓰러워 보인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이렇게 세상 구석구석에 스민 슬픔을 자각하게 되는 일인 것 같다. -
- (146쪽) 나는 사람 인이라는 글자에서 상형문자의 아름다움을 본다. 그 안에는 인간 존재의 본질, 그리고 슬픔의 기호학이 들어 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슬픈 존재라는 것, 하지만 함께 기대면서 아픔을 나누다 보면 그렇게 또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글자다. 나이를 먹으면 눈이 점점 나빠지지만 슬픔을 보는 눈은 차츰 밝아진다. 노안이 오는 이유는 남의 허물을 너그럽게 넘겨주라는 뜻인 것 같고, 노안에도 불구하고 슬픔이 더 잘 보이는 이유는 필요한 곳에 가서 같이 아파하며 손잡아 주라는 뜻인 것 같다. 나이를 먹어 힘이 빠진 어깨, 좀 더 둥글둥글해진 어깨를 빌려주고 함께 울어주라고. 그렇게 사람으로 살라고. -
- (156쪽) 이 세상을 보다 살 만한 곳으로, 보다 아름다운 곳으로 바꾸는 건 기본적으로 슬픔이다. (중략) 나는 세상을 슬픔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눈물로 세상을 씻어내기에 이 세상이 조금 더 맑아진다고 생각한다. (중략) 왜 우는지 이유를 들어보고 마음을 만져주고, 그 이유를 서투르게라도 바로잡아 놓고 나면 세상은 한결 따뜻한 곳이 되어 있다. 슬픔은 힘이 세다. -
- (164쪽) 어른이 되면 자연스레 슬픔의 영역이 늘어나지만, 영역의 확장이 저절로 일어나지만은 않는다. 슬픔을 감각하는 능력을 부지런히 키우는 것은 어른의 책무이기도 하다. 신형철 평론가가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말한 것도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그는 인간이 배울 만한 가장 소중한 것과 인간이 배우기 가장 어려운 것은 정확히 같은데, 그것은 바로 '타인의 슬픔'이라고 했다. 뒤에 오는 이들에게 눈물로 씻어낸 조금 더 맑은 세상을 전해줄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모르는 사람의 그늘을 읽는 일'을 '할 일'로 여긴다. -
' 슬픔을 감각하는 능력을 부지런히 키우는 것은 어른의 책무이기도 하다.'
돌아보니 나는 어른으로서의 책무를 조금은 이행하고 있는 듯하다. 타인의 슬픔이 마음 아프게 다가오는 경우가 많으니.
ㅡ 너와 나 ㅡ
- (310쪽) 그러므로 사랑은 완벽한 이해, 충만한 합일이 아니다. 그저 곁에 있으려는 노력이다. 나는 너를 이해할 수 없고 다만 사랑할 뿐이다. 천을 두르고서라도 너에게 매달려 입 맞추려는 몸짓이 사랑이다. 이해 understanding라는 단어는 너의 그늘 아래에 under 서 보는 standing 일일 텐데, 나는 이렇게 이해 불가능해 보이는 모습으로 흰 천 아래 서 있는 이 두 사람이 이해라는 단어의 본질에 더 가까이 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해도 사랑도 환상에 가까운 개념이다. 희망이라는 것은 우리가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근본적으로 서로의 깊은 곳까지 닿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바로 그 지점에 있다. 전자의 경우라면 우리는 이해가 불가능함을 깨닫는 순간 서로를 떠나게 되지만, 후자의 경우라면 그 모든 것과 상관없이 서로의 곁에 남을 수 있다. -
- (328쪽) 부모와 자식을 빼놓고는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원래는 낯선 사람이었다고 생각하면 신기하고 뭉클하다. 나는 30대에 만나 인연을 맺은 내 반려인을 '전혀 모르는 사람'으로 이미 20대에 만난 적이 있다(서로를 모르는 채로 같은 시공간에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언제 만났는지도 잘 기억이 안 나는 사람이 내 곁에 오래 있는 것을 보면서, 사람이든 물건이든 우리가 특별한 관계가 되는 데는 그렇게 대단하거나 분명한 이유가 필요하지 않다던 정명희 작가의 말을 떠올린다.
사랑은 여백을 품고 그저 곁에 있어주는 일이 아닐까,라고 썼다. 곁에 있어주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관계'라는 의미의 영어단어 'relation'은 라틴어 're'와 'latus'의 결합에서 왔는데, 'bring back' 혹은 'bear/carry again'의 뜻이라고 한다. '나를 네 옆자리로 다시 갖다 놓는 일, 너라는 짐을 기꺼이 다시 지는 일'이라고 해석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너를 모르겠는 이유는 앞서도 말했듯 우리가 원래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인 데다 계속 온도가 바뀌는 여러 겹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이해하려면 자꾸 네 옆자리로 돌아가 어슬렁거려야 한다. 그렇게 오랜 시간 각도를 쌓아가며 네 곁에 있는 일. 나는 그게 사랑이라고 믿는다. 결과가 중요한지, 거기에 이르는 과정이 중요한지를 두고 여러 이야기가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길을 함께 가는 사람이 아닐까 하고 지금의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
- (331쪽) 매들린 밀러의 <키르케》에서 키르케가 처음으로 연정을 느꼈던 글라우코스와의 대화를 마지막에 놓아두고 싶다. 글라우코스는 나이를 먹으면 아버지에게서 독립해 자기 배와 자기 집을 갖고 싶다고 말한다. 그리고 계속 불을 지필 거라고 말한다. "당신을 위해 항상 피워놓을 거예요. 허락만 해주신다면.” 그 말을 듣고 키르케는 이렇게 말한다. “그보다는 의자를 항상 준비해 놓았으면 좋겠구나. 찾아가서 너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사랑은 불을 피우는 일인 것 같지만 그보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항상 의자를 준비해 놓는 일이다. 당신이 지금껏 의자를 당겨 내 앞에서 이야기를 들어준 모든 시간들과 그 안의 마음에 감사한다. 나도 계속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
'사랑'은 '여백을 품고 함께 있어 주는 일', '관계'는 나를 네 옆자리로 다시 갖다 놓는 일, 너라는 짐을 기꺼이 다시 지는 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작가는 적당한 거리를 이야기한다. 완벽한 이해는 없으니 욕심을 버리고 함께 걸어가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지 않고 살 수 없으니 다른 사람의 옆에 다가가라고 말한다. 문제는 적당한 거리가 얼마큼일까 하는 것. 얼마만큼의 거리에서 나는 만족할 수 있을까? 마음이 하는 일이니 쉽지 않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체념 때문이든 삶의 경험 때문이든 그 거리를 인정하고 덜 서운하게 여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간혹 흔들리기는 하지만.
아홉 개의 키워드 중 거울, 슬픔, 너와 나 부분이 인상적이었지만 책 곳곳에서 발견되는 인상적인 문장들도 참 매력적이다.
(104쪽) 좋아하는 건 따로 있지만 남에게 그럴듯해 보이는 간판을 따기 위해, 살다 보면 어느 날 거울 속에서 내가 아닌 것 같은 나의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평범이 주는 행복도 깊지만 내 인생은 다수결이 아니다.
(186쪽) 이렇게 식물이 잘 자랄 수 있도록 뿌리 주위에 흙을 봉긋하게 덮어 북을 돋우는 일이, 사람의 경우에도 마음과 몸이 쑥 뻗을 수 있게 기운을 돋우는 일과 의미가 겹쳐 생겨난 말이다. 그러므로 북돋운다는 것은 그렇게 뿌리의 힘을 믿고 기다려주는 것이다. 상대의 힘을 신뢰하면서 서투를 시간을 충분히 주는 일이다.
(200쪽) 사소하고 하찮아 보이는 일상이 두텁게 깔려 있기에 우리 삶에도 반짝이는 순간들이 존재한다. 낯선 곳으로의 여행이 반짝인다면 그것은 익숙하게 이어지던 조용한 일상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삶의 8할은 사소하고, 익숙하고, 하찮은 일상의 흐름이다. 그 사소함이 실은 얼마나 반짝이는 것인지도. 사소한 것들은 단단하고, 하찮은 것들은 편안하다.
ㅡ 생각해 봅시다ㅡ
1. '근육, 마녀, 거울, 슬픔, 서투름, 사소함 익숙함 하찮음, 직선과 곡선, 앞과 뒤, 너와 나' 9개의 키워드 중 가장 인상적인 키워드는?
2. 거울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나요? 거울을 보며 만족스러울 때는 언제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