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우리는 어떻게 이 세상에 들어오고 사람이 되는가?
ㅡ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받아들여진 것인가, 아니면 세상에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사람이 된 것인가?
ㅡ 적대적인 타자를 환대하는 것은 가능한가? -
작가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과정으로 ‘사람의 조건', '사람의 자격'에 대해 탐구하고 있다.
- (26쪽) 이 책의 키워드는 사람, 장소, 그리고 환대이다. 이 세 개념은 맞물려서 서로를 지탱한다. 우리는 환대에 의해 사회 안에 들어가며 사람이 된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리/장소를 갖는다는 것이다. 환대는 자리를 주는 행위이다. -
하나. 우리는 어떻게 이 세상에 들어오고 사람이 되는가?
-(31쪽) 사람이라는 것은 어떤 보이지 않는 공동체 도덕적 공동체 안에서 성원권을 갖는다는 뜻이다. 즉 사람임은 일종의 자격이며, 타인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 이것이 사람과 인간의 다른 점이다. 이 두 단어는 종종 혼용되지만, 그 외연과 내포가 결코 같지 않다. 인간이라는 것은 자연적 사실의 문제이지, 사회적 인정의 문제가 아니다. 어떤 개체가 인간이라면, 그 개체는 우리와의 관계 바깥에서도 인간일 것이다. 즉 우리가 그것을 보기 전에도, 이름을 부르기 전에도 그 고유한 특성에 의해 이미 인간일 것이다. 반면에 어떤 개체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사회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어야 하며, 그에게 자리를 만들어주어야 한다. -
작가는 ‘사람의 조건’으로 ‘타인(사회)의 인정’을 통해 ‘사회 안’에서 ‘자리(장소)’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타인의 인정’은 ‘환대’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 (207쪽) 환대란 타자에게 자리를 주는 행위, 혹은 사회 안에 있는 그의 자리를 인정하는 행위이다. 자리를 준다/ 인정한다는 것은 그 자리에 딸린 권리들을 준다/인정한다는 뜻이다. 또는 권리들을 주장할 권리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환대받음에 의해 우리는 사회의 구성원이 되고, 권리들에 대한 권리를 갖게 된다. 환대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 hospitality는 '우호'로도 번역되는데, 이러한 번역을 통해 이 단어가 우정이나 적대와 맺는 관계를 좀 더 분명하게 표시할 수 있다. 사회가 잠재적인 친교의 공간을 가리킨다고 할 때, 누군가를 환대한다는 것은 그를 이 공간 안으로 들어오게 한다는 것. 그를 향한 적대를 거두어들이고 그에게 접근을 허락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 (209쪽) "신원을 묻지 않는 환대는 현대 사회의 기본적인 작동 원리이다." 우리는 이것을 세 가지 층위에서 확인한다. 첫째, 모든 인간 생명은 출생과 더불어 사람이 된다. 둘째, 공적 공간에서 모든 사람은 의례적으로 평등하다. 셋째, 자기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뿐이다(정체성 서사의 최종 편집권은 당사자에게 있다). -
둘.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받아들여진 것인가, 아니면 세상에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사람이 된 것인가?
작가는 인간은 태어나면서 ‘무조건적인 환대’를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바로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 (212쪽) 다른 말로 하면, 모든 인간이 어머니의 몸에서 벗어나 이 세상으로 나오는 동시에 사회 안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무조건적인 환대는 현대 사회의 기본 원칙이다. 이 원칙을 위반하는 행위 - 아기를 몰래 낳아서 죽이거나, 가두어서 키우는 일 따위는 어떤 것이든 중대한 범죄로 간주된다. 태어난 생명을 무조건적으로 확대한다는 것은 그 생명이 살 가치가 있는지 더 이상) 따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칸트 철학의 전통에서 사람은 지극히 가치 있는 존재라기보다 가치를 따질 수 없는 존재임을 여기에 부기해 두자. 칸트는 가격을 갖는 사물과 존엄성을 갖는 사람을 대립시킨다. 가격을 갖는다는 것은 비교할 수 있으며 대체 가능하다는 뜻이다. 인간은 그 자체가 목적인 존재이기에 가격을 갖지 않는다. 존엄성의 가격을 계산하고 비교하는 것은 곧 그것의 신성함을 모독하는 것이다. 타자를 사람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그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에 대한 질문을 괄호 안에 넣은 채 그를 환대하는 것이다.-
셋. 적대적인 타자를 환대하는 것은 가능한가?
무조건적인 환대를 생각할 때 그 누구도 사람 자격을 박탈할 수 없음은 당연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논의되는 것이 어느 경우에든 사람 자격을 인정해야 할까 하는 것이다. 살인자와 같은 반사회적 행동을 한 사람의 경우도 절대적 환대를 유지해야 하는지, 쾌고감수능력이 없는 뇌사자의 경우에도 사람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야 하는지 , 비자발적 안락사가 정당화될 수 있는지 등의 문제가 역사 속에서 계속해서 논쟁거리가 되고 있는 것을 보면 답을 내기는 쉽지 않다.
-(230쪽) 그러므로 환대란 어떤 사람이 인류 공동체에 속해 있음을 인정하는 행위, 그가 사람으로서 사회 속에 현상하고 있음을 몸짓과 말로써 확인해 주는 행위라고 말하기로 하자. 그 경우 데리다가 제시하는 절대적 환대의 세 번째 조건을 수용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어떤 사람을 절대적으로 환대한다는 것은 그가 어떤 행동을 하든 처벌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어떤 경우에도 그의 사람 자격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살인같이 반사회적 행동을 한 사람 역시 사회의 구성원으로 계속 환대된다. 다시 말해 그는 사회 안에서 자기 자리를 유지하며, 성원권을 박탈당하지 않는다. -
-(241쪽) 그러나 사형에 반대하느냐 찬성하느냐, 처벌의 대상을 범죄로 보느냐 범죄자로 보느냐는 중요한 차이이다. 나는 베카리아의 사형폐지론이 사회의 구성원리에 대한 깊은 통찰을 표현하고 있으며, 이 통찰의 빛이 18세기 이래 지금까지 사법 개혁을 둘러싼 모든 논의의 지평선을 밝히고 있다고 믿는다. 법이 정당성을 가지려면 환대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환대란 타자를 도덕적 공동체로 초대하는 행위이다. 환대에 의하여 타자는 비로소 도덕적인 것 안으로 들어오며, 도덕적인 언어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된다. 사회를 만드는 것은 규범이나 제도가 아니라 바로 환대이다.
신원을 묻지 않는, 보답을 바라지 않는, 복수하지 않는 환대, 사회를 만드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의 절대적 환대이다. 누군가는 우리가 한 번도 그런 사회에서 살아본 적이 없다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사회운동의 현재 속에 그런 사회는 언제나 이미 도래해 있다. -
-(250쪽) 어떤 생명체가 사람이냐 아니냐는 그 생명체의 삶과 죽음에 대한 우리의 개입 방식을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이다. 만일 어떤 생명체가 쾌고감수능력이 있다면 그 생명체에게 고통을 주는 것, 예를 들어 비좁은 우리에 가두어 움직일 수 없게 한다든지, (밀집 사육되는 닭의 부리를 자르는 것처럼) 몸의 일부를 자른다든지, (실험용 동물들에게 그러는 것처럼) 일부러 병에 걸리게 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잘못이다. 하지만 그 생명체가 사람이 아니라면, 즉 스스로를 시간 속의 존재로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 생명체를 고통 없이 죽이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그 생명체는 내일의 관념을 갖고 있지 않으므로, 삶이 오늘 끝난다 해도 아무 불이익이 없다. 이는 어떤 조건(가축에게 최대한의 복지를 제공하며, 도살의 고통을 최소화한다는 조건하에서는 육식이 허용될 수 있음을 함축한다. 하지만 싱어는 현대적인 축산 시스템은 이런 조건을 충족시킬 수 없다고 말한다)." 동시에 비자발적 안락사나 '비가역적으로 의식이 소실된 환자의 장기 이용을 도덕적으로 정당화할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사람’과 ‘죽음’의 관계를 다룬 부분이었다. 부모 세대의 노년과 죽음을 지켜보면서 ‘사람답게’ 늙고 죽는다는 것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 사회에 마련된 합법적인 또는 비합법적인 선택지 중 나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그 선택으로 나는 좀 더 ‘사람답게’ 죽을 수 있을까? 나는 최소한 다른 사람을 괴롭히지 않고 나의 의지를 실현하는 죽음을 맞고 싶지만 그것이 참 어려운 일임을 주변 사람의 삶을 통해 느끼고 있다.
이러한 선택에 작가도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의 고민이 있었던 듯싶다. 죽음 뒤에 갖는 ‘사람의 자격’을 이야기하고 있으니........
- (254쪽) 사실 자발적 안락사와 비자발적 안락사, 사후의 장기 기증과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의 장기 적출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이것은 결코 연장선에 있는 두 지점, "미끄러운 경사로의 위쪽과 아래쪽이 아니다.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넘어가려면, 우리는 그저 어떤 판단의 기준들을 완화하고 변경하는 게 아니라 도덕의 기초 자체를 재고해야 한다.
싱어는 무뇌아나 대뇌피질이 죽은 사람은 사람이 아니므로 장기를 적출해도 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뇌사자의 몸에서 장기를 적출할 수 있다는 것이 곧 뇌사자는 사람이 아니라는 의미는 아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죽은 뒤에도 사회 안에 여전히 그 사람의 자리가 남아 있다고 믿는다. 다른 말로 하면 그 사람과 우리의 관계가 여전히 어떤 식으로든 유지된다고 믿는다. 죽은 사람을 위해 무덤을 만들고 꽃을 갖다 놓는 것은 이 때문이다. 죽은 사람의 '뜻'을 확인하려 하고, 그의 '명예'를 지키려 하는 것 역시 이런 믿음에서 비롯된다. 뇌사자의 장기 적출은 이런 맥락에서 해석되고 정당화되어 왔다. 우리는 뇌사자가 아무 '이해관계'도 갖지 않기 때문에 그의 몸을 마음대로 훼손해도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뇌사자가 세상을 떠나면서 그의 몸이 유용하게 쓰이기를 바랐으며, 그의 의지를 존중하는 것이 그를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즉 뇌사자의 장기 적출은 유언의 집행이라는 틀 안에서 이루어진다. 장기의 기증은 죽음을 앞둔 사람이 사회와의 유대감을 표현하는 행위이며, 죽은 뒤까지 자신에 대한 기억을 남기고, 그럼으로써 사회 안에 자신을 위한 상징적 장소를 남기려는 시도이다. 우리는 그의 마지막 선물을 받음으로써 이 유대를 확인한다.-
-(256쪽) 아니다. 우리는 죽은 사람을 어떻게 대하느냐야말로 도덕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죽은 사람은 우리가 무엇을 준들 갚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맺었던 관계의 본질은 우리가 더 이상 남들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게 되는 시점에 받게 될 대접을 통해 확인된다. 물론 죽은 사람의 몸 자체는 그 사람이 아니다. 죽은 사람의 '사람'은 몸과 분리되어 어딘가 다른 곳에 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사람에게서 온 무언가가 그 사람의 존재 혹은 부재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어떤 힘이, 그가 두고 간 이 껍데기 속에 깃들어 있음을 느낀다. 그가 남긴 다른 유품들과 마찬가지로, 이 껍데기는 팔거나 버리거나 아무에게나 넘겨주어서는 안 되는, “간직할 의무가 있는 물건이다. 우리는 이 물건을 의례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망자와의 관계를 지속한다.
죽은 사람과 산 사람 사이에 의례적인 관계가 지속된다는 것은 죽은 사람이 여전히 사회의 구성원임을 뜻한다. 사회는 산 자들로만 이루어진 게 아니다. 죽은 자들 역시 사회 안에 자리를 가지고 있다. '시계의 시간, 즉 일상의 산문적 시간이 지속되는 동안 우리는 이 사실을 잊고 지낸다. 하지만 축제와 기념일은 동질적인 시간의 흐름을 폭파하고, 기억의 시곗바늘을 매번 같은 자리로 돌려놓아, 죽은 자들이 산 자들의 시간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한다. 축제와 애도의 의례가 어딘가 닮아 있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축제에는 죽은 자들도 초대된다. 산 자들이 퍼레이드를 벌일 때, 죽은 자들 또한 그 대열 속을 함께 걸어가는 것이다. -
<생각해 봅시다>
1. 작가는 다음과 같이 사람이 된다고 주장합니다. 당신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나요?
”우리는 환대에 의해 사회 안에 들어가며 사람이 된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리/장소를 갖는다는 것이다. 환대는 자리를 주는 행위이다. “
2. 반사회적 행동을 한 사람에 대한 무조건적 환대, 비자발적 안락사, 자발적 안락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사람, 장소, 환대 #김현경 #자발적 안락사 #비가역적 안락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