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이라는 여행의 정수
5박 7일 여행이 30화로 팽창되다니, 저도 놀랍습니다. 문보영 시인의 산문집 <삶의 반대편에 들판이 있다면> 책 속 한 문장이 떠올랐습니다.
‘아이오와에서 지낸 일수가 87일이었는데 내가 쓴 일기는 100편이 넘으니 일기를 쓰는 동안에는 시간을 무한히 팽창시키는 능력이 주어지나 보다.’
식당에서 가끔 주문하는 ‘2인분 같은 1인분이요’처럼 제 뉴욕 여행기는 한 달 같은 일주일이었습니다. 친구들에게 자칭 ‘뉴욕 출신’이라고 운운했던 건, 팽창력에 대한 자신감이었습니다. 저 자체에 대한 팽창 욕구도 있었기에 뉴욕을 선택했습니다. 정서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먼 뉴욕에서 나답지 않은 여행을 해보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그 생활권 밖의 여행이 주는 영감과 자극을 받으면, 지금보다는 더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거죠. 그러기 위해서 제가 첫 번째로 벗어나야 했던 건, 가성비였습니다. 늘 싸고 가성비 넘치는 것에만 돈을 써보니, 뭘 사도 새롭지가 않더군요. 여행도 똑같았습니다. 그래서 강제로라도 가성비를 따질 수 없는 지옥 물가의 뉴욕에 저를 넣어버렸습니다. 돈 따지지 말고, 화끈하게 나에게 투자하자고 결심했습니다.
그렇게 다짐했는데, 막상 글 써보니 여행하면서 단 한 번도 돈 생각 안 한 적이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가성비 스테이크집을 찾아다니거나, 뮤지컬을 저렴한 가격에 보기 위해 러시티켓을 구하고 지하철 비용을 아끼기 위해 30분 거리는 걸어 다니는 등 습관처럼 돈을 아꼈습니다. 처음에는 여행기를 쓰기 시작했을 땐, 뉴욕에서 과감하게 나에게 투자했을 때의 생각을 담고자 했는데 실패했습니다. 지금 읽어보니, 가성비 있게 여행하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끝내주는 꿀팁이 도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마지막날, 비행기에서 지갑을 조심스레 열어보았습니다. 납작해졌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현금 100만 원이 남아있었습니다. 아껴 썼다는 뿌듯함과 동시에 씁쓸한 마음이 들더군요. 역시 여행을 온다고 해서 사람이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하루는 친구가 제주도에서 가는 맛집마다 다 문을 닫거나, 계획대로 되는 일이 없어서 완전 망한 여행을 하고 왔다고 한탄했습니다. ‘여행’과 ‘망하다’는 글 쓰는 제 기준에서는 도무지 붙을 수 없는 조합입니다. 죽지만 않았다면 완전 망한 여행은 없습니다. 가는 맛집마다 문을 닫았기 때문에, 친구가 저에게 한탄할 이야기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제 여행 또한 계획대로 되는 게 없어도 망한 여행이 절대 아닙니다. 마지막날, 열어본 지갑으로부터 여러분들에게 할 말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인생 사진을 많이 건져올 거라는 계획이 틀어진 덕분에 저는 뉴욕에서 국제 사진 대회를 열었습니다. 호퍼의 작품을 딱 한 점만 보고 왔기에 호퍼의 과거를 알았을 때, 한 점만 봐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여행은 이런 식입니다. 이야기가 생겼다면 여행은 절대 망할 수 없습니다.
뉴욕 이후로 저는 해외여행을 못 가고 있습니다. 사실, 안 가고 있는 게 맞습니다. 뉴욕만으로도 충분히 여행의 정수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뉴욕에서 글쓰기의 새로운 가치를 찾아버린 이상, 다른 나라는 궁금하지만, 선뜻 추진력이 생기지 않습니다. 여러분들도 여행의 정수를 느낀 곳이 어디일까요? 제 뉴욕글로 여러분의 여행을 한번 더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