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과 소설 그 사이
어스름한 저녁, 어린 내가 엄마와 손을 잡고 어느 식당으로 향했다. 엄마와 나의 발걸음은 가볍다 못해, 아주 신나있었다. 잡은 손을 앞뒤로 흔들며, 엄마를 올려다보고 물었다.
“오늘 4인분 시켜도 돼?”
“그럼. 아빠가 저녁 먹고 오는 날이 우리가 막창집 기둥을 뽑아버리는 날이야.”
외식을 싫어하는 아빠가 저녁 약속이 있는 날은 우리에겐 또 다른 생일이었다. 엄마는 저녁밥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고, 나는 막창집을 갈 수 있는 날이었다. 동네 놀이터에서 집 가는 길에 있는 막창집은 냄새로 간판을 켠다. 막창집 앞을 한참 서성인 끝에 코를 부여잡고 집으로 달렸다. 달리는 내내 집에 아빠가 없기를 바랐다. 소원이 이뤄진 날은 겨우 두 달에 한두 번이었다. 엄마는 그런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았다. 우리는 자리에 앉자마자 막창 4인분과 된장찌개를 시켰다. 막창 기름이 자작하게 남아있을 때쯤, 볶음밥까지 알차게 시켜 먹었다. 사장님은 건장한 아저씨들보다 잘 먹는 우리를 보곤 서비스로 음료수까지 주셨다.
하루는 엄마가 익지 않은 막창을 집으려는 나에게 고백하듯 조심스레 말했다.
“막창은 사실, 돼지의 똥이 지나가는 부위라는 걸 알고 있니?”
나는 어린 나이치고는 고지혈증 수치가 높았다. 엄마는 이대로 안 되겠다고 느꼈는지, 막창과 딸 사이를 갈라놓기 위한 전략으로 막창에 대한 비밀을 폭로했다. ‘어쩐지 냄새가 남다르더라’ 하면서도 젓가락을 놓지 않은 딸을 보며 엄마는 단념했다.
덕분에 서른이 된 지금까지도 자취방 근처의 막창집을 배회하며 최고의 식당을 선별하고 있다. 입맛의 장벽이 낮은 나는 막창집만큼은 포기할 수 없는 깐깐한 기준이 있다. 우선, 십 리 밖에서도 꼬숩한 막창 냄새가 솔솔 나야 한다. 프랜차이즈 막창집은 대부분 아무 냄새가 나지 않는다. 그리고 꼭, 동그란 막창이어야 한다. 네모난 막창은 겉면만 바삭하지, 고소한 육즙이 터지기에는 부적합하다. 이 외에도 막장이 냉동된 상태였는지, 겉절이로 콩나물무침이 나오는지도 꼼꼼하게 따져본다.
미슐랭 수준의 심사를 통과한 식당이 딱 한군데 있다. 걸어서 3분 거리에 있는 단골 식당의 냄새는 다이어트할 때면 늘 곤혹스럽다. 숯불 향을 얹은 막창 냄새는 불금에 꼭 오리라 결심하게 만든다. 아빠뻘이 되는 사장님은 밖에서 숯불을 피우다가도 나를 발견하면, 금요일에 오라는 깨알 홍보도 잊지 않았다. 아삭한 콩나물무침에 싸 먹는 통통한 막창은 글 쓰는 지금도 군침을 돌게 한다. 사장님은 4년간 내 이름도 모른 채, 오면 오는 대로 반겼다. 서글서글하신 성격만큼이나 인테리어도 소박하고 정겹다. 사장님은 여유로울 때면, 모든 테이블을 돌아다니면서 반갑게 인사하거나 짧은 대화를 나눴다. 그 사이에서 소맥과 함께 막창을 먹으면 진짜 동네 현지인으로 인정받은 기분이었다. 근본 없는 소속감이었다.
애정을 쌓기까지 4년이 걸렸지만, 실망은 4초도 걸리지 않는다. 고지혈증도 막지 못한 막창을 단칼에 끊어낸 건 사장님의 한마디였다. 한 달 만에 친구 서우와 단골 식당을 갔던 날이었다. 한번 먹고 계속 오자고 보채면 곤란하다며 펌프질을 끊임없이 했다. 사장님은 항상 내가 앉던 자리로 안내하며 왜 이렇게 오랜만에 왔냐는 앙탈 섞인 안부를 물었다. 서우에게 사장님과의 친분을 과시하듯 식당을 지나칠 때마다 막창 맛이 그리웠다고 했다.
“아이고. 달거리했나 보지.”
서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 나는 호탕하게 웃어넘겼다. 사장님이 주문한 막창을 가지러 간 사이, 서우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원래 저런 농담을 자주 하시니?”
서우가 말하길, ‘달거리’는 생리나 월경을 뜻하는 옛말이었다. 나중에 찾아보니, 어른들이 ‘오랜만이다.’라는 의미로 쓰이는 관용표현이었다. 이상한 말은 사장님이 내뱉었는데 얼굴을 들 수 없는 건, 나였다. 상대방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면 웃어넘기는 나의 오랜 버릇이 원망스러웠다. 서우 앞에서 사장님과의 친분을 과시한 몇 분 전의 내가 꼴 보기 싫었다. 우리는 말 없이 막창을 구웠다. 우리 테이블에 찝찝한 감정을 던지고 간 사장님은 옆 테이블 손님과 평소처럼 대화를 나눴다. 막창마저도 이런 우리 마음을 몰라주는지 평소처럼 맛있었다. 한숨이 자꾸만 비집고 나왔다. 서우는 맛있는 막창을 질겅질겅 껌 씹듯이 먹는 나를 보며 위로했다.
“나쁜 의도로 말씀하신 것 같진 않았어.”
“나쁜 의도가 아니라고 안 들었던 말이 되진 않아.”
밤송이라고 뾰족한 가시가 따갑지 않은 건 아니듯 말이다. 상대방에게 의도는 감각되지 않는다. 세상을 더 윤택하게 하는 건, 자신 위주의 의도를 초월한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다. 작가 정희진은 ‘무지로 사용된 언어는 걸어 다니는 재앙’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날, 사장님은 나에겐 재앙이었다.
계산할 때, 단 1초도 사장님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맛있게 먹었냐는 질문에도 건조한 단답만 남겼다. 찝찝하게 식당을 나서며, 서우에게 비통하게 말했다.
“오늘 유일한 동네 맛집이 무너졌어.”
단골 식당은 나의 신념을 시험해보려는 듯, 늘 꼬숩한 향이 코를 찌른다. 가끔은 어릴 적, 동네 막창집 앞을 서성이다 집으로 달려갔던 것처럼 한참을 단골 식당 앞을 서성거린다. 그리곤 사장님을 원망하며, 자취방으로 달려간다. 하나뿐인 단골 식당을 잃고, 단단한 신념을 얻었다고 합리화하며 오늘도 ‘막창 맛집’을 열심히 검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