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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적 손길

수필과 소설 그사이

by 지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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왁자지껄한 술집은 ‘시간’이라는 개념이 증발한 듯했다. 자정이 넘어도 사람들은 저녁 9시 같은 에너지로 술집 안을 가득 채웠다. 반대로 평균 30살이 된 우리 테이블에는 하품 소리가 유일한 소음이었다. 활발한 술집과 뚜렷하게 대비되는 할머니가 들어왔다. 불편한 다리로 껌이 든 자그마한 바구니를 들고 다니며 테이블마다 하나씩 사주기를 애원했다. 손님들은 할머니가 투명 인간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랑곳하지 않고 활발한 분위기를 이어갔다. 할머니가 우리 테이블로 오기 전부터 거절에 대한 부담감에 더 피곤해졌다. 최대한 정중히 거절해도 죄책감은 유지되기 때문이다. 친구도 똑같이 느꼈는지, 집 가기 귀찮아했던 직전과는 달리, 인제 그만 집에 가자며 가방을 들었다.


바깥을 나오자 싸늘한 공기에 몸이 자동으로 움츠려졌다. 친구들과 헤어지고, 집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모래주머니를 단 듯이 무거운 몸으로 화장 지우고, 씻을 생각 하니 아득해졌다. 묵직한 다리를 이끌고 마지막 횡단보도를 건넜다. 그때, 반대편 끝에서 검은 봉지로 보이는 물체가 보였다. 얼마 전, 난데없이 날아온 비닐봉지가 운전자의 시선을 가려서 발생한 교통사고 영상을 보았다. 그 잔상이 떠올라 초인적인 힘으로 달려갔다. 봉지를 낚아채려고 할 때, 내 발걸음이 급정지했다. 내가 치우려 했던 봉지는 사람이었다. 인도와 도로에 절반에 걸쳐 대자로 뻗은 분명한 사람이었다. 아빠 정도의 나이로 보이는 아저씨는 눈을 감고 미동도 없었다. 그대로 내버려 두기에는 좌회전하는 차에 깔리기 딱 좋은 위치였다.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손끝으로 아저씨를 쿡쿡 찌르며 불렀다.


“아저씨. 눈 뜨세요. 술 드셨어요?”


쿡쿡 찌르다가 주먹으로 퍽퍽 치는 수준이 되자, 아저씨는 눈을 번쩍 떴다. 그러고는 심장을 부여잡더니,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구…. 구급차를 불러줘요. 심장질환이 있어요….”


당연히 만취자인 줄 알고, 태평하게 대처했던 내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아저씨의 눈이 뒤집히기 시작하자, 구급대원에게 제발 빨리 와달라며 재촉했다. 긴박한 상황 속에서 할 수 있는 거라곤 발을 동동 구르며 아저씨에게 끊임없이 말 거는 일밖에 없었다. 점점 질문의 소재가 바닥날 때쯤, 구급차 2대와 경찰차 1대가 야밤의 고요를 흩트리며 나타났다. 구급대원은 내리자마자 아저씨의 상태를 살피고, 경찰차는 놀란 나를 달래며 상황을 물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설명하면서도 한쪽 머리로는 만취자로 넘겨짚어서 아저씨의 골드 타임을 놓쳐버린 장면을 상상했다. 그때, 다 죽어가던 아저씨가 갑자기 완치라도 된 듯이 소리쳤다.


“새끼들아!!! 잠 좀 자게 내버려 둬!!!”


구급대원의 얼굴에서 짜증 섞인 허탈함을 지우지 못했다. 피부 모공을 뚫고 나오는 술 냄새가 그제야 맡아졌다. 나는 아저씨보다 더한 죄인이 되어, 신원 파악을 위해 옷을 뒤적거리는 구급대원에게 거듭 사죄했다. 나의 신고가 고급 인력 6명의 시간을 낭비하게 했다니. 여전히 인사불성인 아저씨의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떨어졌다. 경찰은 핸드폰으로 ‘마누라’라고 저장된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로 빽빽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술 때문에 이혼하셨네요.”


집으로 가면서도 미안한 마음에 자꾸만 뒤돌아봤다. 만취자를 처리하는 게 구급대원과 경찰의 주요 업무는 아닐 텐데. 아저씨를 원망할 때면, 술집에서 절뚝이는 다리로 애원하던 할머니가 동시에 떠오른다. 도움이 절실한 할머니는 외면해놓고 만취한 아저씨를 팔 벗고 도운 격이다.


얼마 후, 친구 명태에게 절름발이 할머니와 만취 아저씨에 대해 말해주었다. 명태는 잠자코 듣더니,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둘 다 잘 대처한 것 같은데?”


명태의 말은 절름발이 할머니의 경우에는 껌 팔아준 돈으로 술을 사 먹었을 테고, 만취 아저씨의 경우에는 신고하지 않았다면 지나가는 차에 깔렸을 테니, 아저씨가 아닌 운전자를 도왔다고 생각하라는 것이다. 고민 맛집으로 소문난 명태다운 직언이었다. 그런데도 마음 한구석에서 절름발이 할머니가 방을 빼지 않았다. 일상 중에도 잔상이 불쑥 떠올랐다. 사무치게 비참한 장면을 마주하게 되면, 오히려 외면하게 된다. 나와 근접해 있다는 불안에 마음이 구겨지기 때문이다. 만취는 자신이 선택했다면, 빈곤은 자신이 선택할 수도, 예측할 수도 없다. 언젠가는 절름발이 할머니를 덮친 빈곤이 나를 덮치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외면하게 된다. 심지어, 할머니 얼굴에서 내 얼굴이 겹친 모습을 상상하기도 한다. 명태의 말처럼 껌 판 돈으로 편의점에서 소주를 마실지도 모른다. 그 불신이 위안이 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폭염주의보 한가운데 어눌한 말투로 한 푼만 달라고 울부짖는 앉은뱅이 아저씨를 모른 척한다. 지하철에서 승객들에게 상자로 만든 전단을 돌리며 천원만 달라는 아주머니를 피해, 옆 칸으로 옮긴다. 옮긴 자리에서도 새어 나오는 애걸하는 아주머니의 목소리를 이어폰으로 차단한다. 진눈깨비 눈이 내리던 날, 하천 다리를 지붕 삼아 잠든 노숙자에게 눈길 하나 주지 않는다. 이기적으로 나를 대신해서 누군가 그들을 도와주기를 바란다. 나는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사람에게만 선택적 손길을 내밀면서 말이다. 내 선행의 수준이 딱 만취자라는 자기혐오조차도 외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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