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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리야 Mar 04. 2024

순리대로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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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리대로 흐른다


순리의 “順”은 순서요, “理”는 이치 또는 이념을 의미한다.

해석하자면 “이치에 따른다.” 또는 “원리에 순응한다”라는 뜻으로

 “순리”란 물 흐르는 듯 모든 것이 자연스럽고 조화롭게 이루어져야 함을 일컫는다. 

한국 사회에서 순리의 개념은 고조선부터 시작됐으며 고대 중국의 철학과 더불어 성장했다고 한다.



만학도 연령대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대학 특강을 한 적이 있다.

강의를 위해 수십 장의 사진엽서를 가져온 나는 학생들로 하여금 가장 자신을 닮은 사진을 고르라 했다. 

쉬는 시간, 학생들은 고민을 하며 그들만의 푼크툼으로 신중히 사진을 골랐다. 

사진을 다 고른 학생들에게 사진에게 하고 싶은 말을 생각한 후 발표하라는 미션을 줬다. 

내 아버지뻘은 되어 보이는 어르신이 손을 들고 앞으로 나오셨다. 

저녁노을 진 하늘, 어딘가로 날아가는 철새 사진을 뽑으신 분이었다.

어르신은 별다른 말씀 없이 강의실 중앙에 서서 한동안 본인의 엽서를 바라본 후 말씀하셨다.

 “그동안 고생했다. 이제 그만 쉬러 가자꾸나.” 



갑자기 강의실에 찬물을 끼얹은 듯 좌중이 숙연해졌다.

인자해 보이는 어르신의 너무나 담담한 목소리였다.

세월의 모든 풍파를 다 이겨낸 듯한 무게감이었다. 

어르신은 본인이 내뱉은 말의 공기를 전혀 느끼시지 못한 듯 또다시 담담하게 자리로 돌아가 앉으셨다. 

그분이 견뎌온 세월의 파도가 강의실에 밀어닥쳤다. 

눈가가 촉촉해진 학생들이 생겨났다. 

다음 강의를 진행해야 하는 내가 순간 말문이 막혀버렸다. 

흐르는 데로 최선을 다해 살아왔을 그분의 삶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듯했다.


발표를 주저했던 학생들이 하나 둘 용기를 내 앞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어릴 적 소아마비로 한쪽 몸을 쓸 수 없는 학우, 

분신과도 같았던 친여동생을 얼마 전 암으로 잃었다는 학우, 

세 아이의 엄마로 이혼해 혼자서 생계를 꾸리고 있다는 학우까지 

모두가 기다렸단 듯 손을 들고 각자의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거친 파도 위 배 한 척, 한쪽 신발이 찢어져 있지만 묵묵히 걸어가는 발, 

햇살이 내리쬐는 탐스러운 과일나무 등. 

자신을 닮은 엽서들에게 그들은 하나같이 응원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었다.

아직도 잊히지 않는 그들의 표정은 삶에 찌든 얼굴이 아닌, 

티 없이 맑고 평화로 가득한 표정들이었다. 





응원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강의에서 내가 오히려 “정화”되었다. 

누구보다 힘들었을 그분들의 메시지가 고요하고 안온했다.

그들은 어쩌면 하늘이 주신 본인들의 고통을 순리라 여기며 극복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연이어 내가 맡은 프로젝트들이 엎어져 고통을 겪고 있던 내게

인생의 멘토 같은 한 선배님이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크게 걱정하지 마세요. 순리대로 되겠죠.”

노심초사하며 조급해하던 나를 느티나무 같던 선배의 한 마디가 다시 일으켜 세웠다. 


고대 로마의 철학가이자 정치가였던 보에티우스의 “철학의 위안”이란 책이 있다.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유배지에서 처형당할 날을 기다리며 쓴 책이다. 

이 책은 모든 운명의 파란에도 불구하고 모든 일은 신이 주관하기에 

신 안에서 위안을 받으라는 철학적이고도 종교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세계의 질서와 원리를 알지 못한다면, 

이 세계가 우연에 의해 무작위로 결정되는 혼돈스러운 곳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네가 이 세계의 질서와 원리를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선한 통치자가 이 세계를 다스리고 있다는 것은 여전히 사실이기 때문에

너는 모든 것이 올바르게 제대로 돌아갈 것임을 의심하지 말아라.”


명심보감 “정기 편”엔 이런 구절이 있다.

"物順來而勿拒(물기거이물추)하고, 物旣去而勿追(물순래이물거)하며,

모든 일은 순리(順理)로 오거든 물리치지 말고, 이미 지났거든 쫓지 말며

身未遇而勿望(신미우이물망)하고, 事已過而勿思(사이과이물사)하라

몸에 닥치지 않았거든 바라지 말고, 일이 이미 지났거든 생각하지 말라.




순리대로 산다는 건 어찌 보면 꽤 어려운 일이다. 

때로는 욕망이, 때로는 잘못된 판단이 순리를 거스르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것이 정해져 있으니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인본주의 심리학의 창시자 “칼 로저스”는 “충분히 기능하는 사람”에 대해 말했다.

“충분히 기능하는 사람”은 완성형이 아닌 경험에 대한 개방성, 실존적 삶에 가치 두기, 자신을 신뢰함, 

자유로운 경험을 함, 창의성의 특성을 가지고 끊임없이 성장하는 사람이라고. 


세상의 순리가 그냥 주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칼 로저스”가 이야기한 “충분히 기능하는 사람”으로 최선을 다했다면 

세상이 “순리대로” 흘러 주지 않을까...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는 것은 순리이다. 

하지만 물의 순리를 논하기 전, 그곳이 사막이나 아스팔트가 아니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순리대로 흐른다”는 조급함에 위로를 건네주는 또 하나의 마법의 주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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