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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리야 Feb 26. 2024

시간이 약이다

EXIT 4

오랜만에 가족여행을 간 날이었다.

아이와 남편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이는 신이 나 편의점에서 듬뿍 사 온 음식거리를 펼쳐놓고 먹방 수준의 흡입을 하고 있었다. 

밤 9시쯤 되었을까. 갑자기 식탁에 올려놓은 핸드폰에 문자 알림 소리가 들려왔다. 

밤늦게 누가 문자를 보낸 걸까. 문자를 확인한 난 놀라 그 자리에 얼어붙어버렸다.

고등학교 절친 민정이의 문자였다. 

김민정 남편 부고. **병원 5호실 , 발인 날짜, 수요일, 상주: 처 김민정, 자 정은성, 정은호. 


9살, 7살 두 아이의 아빠였던 민정이의 남편, 

한참 어린 민정의 아이들과 민정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불길한 느낌이 엄습해 왔다. 

고등학교 때 같은 서클 활동을 했던 우린 묘하게 잘 통하던 친구였다. 

예체능계 피아노를 전공했지만 모의고사 때마다 전교 상위권을 놓치지 않았던 악바리 민정.

사립여고의 온갖 비리와 폭력에 저항한다며 머리를 빡빡 밀고 다니며

소중한 고3 시절을 무참히 날려버린 나.

닮은 점이 전혀 없어 보이는 우린 “정의”와 “다혈질”이라는 교집합으로

다사다난한 여고 시절을 함께 보냈다. 



명문대에 입학한 민정은 같은 학교 선배와 만났고 졸업하자마자 결혼을 했다.

내성적인 남편은 연구원이었지만 얼마 전 회사를 관두고 회계사 시험을 준비한다 했다.

내 친구라곤 거의 만난 적이 없던 우리 남편과도 만난 적이 있는 부부였다. 

선한 인상의 민정의 남편은 법 없이도 살 것 같은 사람이었다. 



민정의 문자 이후 가족 여행은 충격 그 자체였다.

다음 날 아침, 여행 일정을 일찍 종료해 버린 우린 바로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도대체 어떤 사연이고 어떻게 위로를 건네야 하는 걸까.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상주석에 서 있는 민정을 보는 순간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슬픈 영화에도 잘 울지 않는 내가 검은 상복을 입고 홀로 상주석에 서 있는 민정의 모습에

그만 눈물이 터져버렸다. 

굳게 버티고 있었던 민정 역시 나를 보며 이제 자신은 어떻게 사냐는 말을 하며 울부짖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다.   


차가운 눈빛의 첫째 아들 은성이 엄마의 울음소리에 놀랐는지 상주석 근처로 다가왔다. 

아이 앞에서 꾸역꾸역 눈물을 참고 있었던 민정이었다. 

누구보다 강하고, 흔들림이 없었던 민정이 처음으로 무너져 내렸다. 

나 역시 너무도 생경하게 민정을 부여잡고 울고 있었다.

이미 세상을 다 알아버린 듯한 첫째 아들 은성의 차가운 눈빛이 내 뇌리에 꽂혀버렸다. 


누구보다 화목한 가정을 꾸렸던 민정에게 닥친 불행이 남의 일만은 아니었다.

남편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했다. 

차갑게 굳어버린 첫째와 아빠의 부재를 아는지 모르는지 밝게 웃고 있는 둘째의 모습에 가슴이 저렸다. 

홀로 남은 민정이 걱정돼 생일 때마다 케이크를 보냈다. 

화목한 가정에서 누구보다 사랑받으며 행복하게 살았을 민정의 외로운 생일이 마음 아팠다. 

직업을 가져본 적 없었던 민정이 처음으로 세상을 향해 발을 디뎠다. 

우아한 피아니스트가 피아노를 팔고, 장사를 시작했다. 그렇게 3년, 민정은 버티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민정은 그렇게 사랑했던 남편을 이제 조금씩 잊어가고 있다고 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을 한다.

당장은 앞이 안 보여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견디다 보면 지나간다. 

가끔 우스갯소리로 인간이 망각의 동물이어서 정말 다행이라는 말을 한다. 

절대 잊을 수 없는 트라우마도, 시간이라는 약을 통해 조금씩 잊혀 가고 치유가 된다. 



Rose Fitzgerald Kennedy가 말했다. 

“It has been said "Time heals all wounds." I do not agree. The wounds remain.

In time, the mind, protecting its sanity, covers them with scar tissue and the pain lessens. But it is never go. 


“시간이 모든 상처를 치유한다는 말에 난 동의하지 않는다. 

상처들은 남는다. 시간이 지나면 마음은 온전한 정신을 보호하며 흉터 조직과 고통으로 상처를 덮는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로즈케네디의 말처럼 시간을 통해 상처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상처는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것이다. 

마음속 상처받은 아이의 웅크림은 결국 나 자신이 준비가 되었을 때 조심스레 끄집어낼 수 있다. 

시간이 지나 상처가 치유됐다는 말은 완전한 망각이라기보다 “무뎌진다”라고 표현하는 게 맞지 않을까.

상처를 감싸고 있는 흉터 조직에 가려 아픔을 잊고 사는 것. 

그것이 세월이라는 흐름 속에 서서히 침식작용을 겪는 것. 

그렇게 시간은 고통을 무뎌지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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