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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리야 Feb 12. 2024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EXIT2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1988년 출간한 이문열 작가님의 소설 제목이다.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1989년 강수연, 손창민 배우의 영화 제목이기도 하다. 

원작 소설도 인기였지만 1990년 28회 대종상 최우수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 등 총 7개 부문 수상을 휩쓴 인기작이었기에 이 시대를 거쳐간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문장이다. 

영화는 명문대를 나온 시골 청년 형빈이 미국을 동경하는 자유로운 영혼 윤주를 애증해

결국 그녀를 죽임으로 한 남자가 추락해 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소설의 제목은 그리스 신화 이카로스의 추락을 차용한 오스트리아 시인

잉게보르크 바흐만의 시집 “Das Spiel ist aus 놀이는 끝났다”의 국내 번역 제목에서 따왔다고 한다. 


It is a beautiful time when the date stone sprouts!

Each one that falls has wings.

It is foxglove drapes that shroud the poor

and your bud sinks onto my seal.


We must go to sleep, darling, the game is over.

On tip-toes. The white shirts swell.

Father and mother say, there are ghosts in the house

when we exchange our breath.


지금은 대추야자의 씨앗이 움트는 아름다운 시간!

추락하는 모든 것은 날개를 가지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을 가리는 수의에 장식을 박는 것은 붉은 골무.

너의 봉오리 싹이 나의 봉인 위에 떨어진다.


우린 이제 자러 가야 해, 사랑하는 이여, 유희는 끝났다.

발끝으로 살살 걸어서. 하얀색 셔츠가 바람에 부푼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말씀하신다. 우리가 숨결을 나눌 때면 

집 안에 유령이 나온다고.



바흐만의 시 제목은 영어로 번역하면 “The game is over”이다. 

오스트리아 시인 바흐만은 1926년 생이다.

바흐만이 12세가 되던 1938년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제압 작전을 지시했고,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바흐만은 1953년 등단했는데 고통과 불안, 실존에 관한 그의 작품들은

아마도 불안했던 이런 유년 시절 환경이 영향을 미쳤으리라. 


아직도 기억에 남는 초등학교 졸업식.

졸업식 아침 일찍 교실에 온 난 한 친구가 창문에 뭔가를 붙이고 있는 걸 보았다.

큼지막한 알파벳 하나가 창문 하나를 채울 정도의 크기였다. 

만들기를 잘하고, 생각이 깊었던 친구였다.

유난히 조숙했던 아이라 뭐가 돼도 크게 될, 떡잎부터 달랐던 친구가 밤새도록 집에서 만들었는지 

정교하게 디자인한 알파벳을 창문에 하나하나 붙이고 있었다. 

알파벳을 8개 준비했는데 창문 하나씩 알파벳을 붙이고 나니 이윽고 완성된 글자. 

“GAME OVER”. 


담임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아이들과 싸움이 생기거나 반에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제갈량보다 더한 지혜로 모든 일을 해결하셨던 지혜로웠던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GAME OVER”를 보셨고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으셨다.

선생님은 그날 누가 저걸 창문에 만들어 붙였는지 물어보지 않으셨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도 묻지 않으셨다. 

창문 하나당 알파벳 글자 하나씩을 붙였으니

졸업식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운동장에서도 6학년 2반은 멀리서도 확연히 구분되었다. 


초등학교 6학년. 그 친구는 왜 “GAME OVER”를 써 붙였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콧물만 흘리고 있을 아무것도 모르던 나이에 

그 아이는 이미 세상을 다 알아버린 걸까.

아님 누구보다 빨리 중2병을 앓았던 걸까. 

그 친구는 결국 커서 자기가 항상 말했던 “TV에 나오는 유명한 사람”이 되었다. 

성인이 되어 우연히 방송국 로비에서 마주친 친구와 난 서로 정말 반가워하며

또 보자는 이야기를 하고 헤어졌다. 

음악을 하던 친구는 출연자로, 난 프로그램을 하던 PD로 각자 다른 곳에서 각자의 삶을 살고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생이 창문에 붙이던 게임 오버는 어떤 의미였을까. 

천상병 시인의 시 “귀천”의 한 구절처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처럼 아름다웠다고 말하고 싶었던 추억의 소풍이었을지 

진정한 유희를 끝내고 다음 챕터로 넘어가기 위한 첫 정거장이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말 그대로 조숙해 남들보다 한 걸음 앞서 나갔던 그 친구에게

그 시절이 징글징글한 유년기였기에 안녕을 고한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그 시절이 친구에게 희극이었는지 비극이었는지 의미는 알 수 없으나 

언젠가 다시 만나면 한 번은 물어보고 싶은 추억이다. 



잉게보르크 바흐만의 “Das Spiel 유희”와 “추락”은 무엇이었을까. 

그녀의 삶을 그린 영화 

“사막으로의 여행/Ingeborg Bachmann-Journey into the Desert 2023”을 보면 

시인 잉게보르크 바흐만이 유명한 극작가 프리슈와 사랑에 빠진 장면이 나온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열정적이었으나 일과 사랑 모두에서 결국 끝없이 부딪힌다. 

영화에서 지친 바흐만은 친구들과 사막으로 여행을 간다.

잃어버린 자신을 찾기 위한 여행을 가는 것으로 영화는 끝맺음한다. 

실제 잉게보르크 바흐만은 프리슈와 열정적인 사랑을 했고

결별 이후 쓰인 그녀의 시는 고통, 타락 등의 언어로 표현되었다. 

이후 그녀의 아파트에서 발생한 화재 당시 바흐만은 침대에서 누운 채 발견되었는데

약물 중독으로 화재를 감지하지 못했다는 추정과 자살 가능성 등 여러 의문이 남아 있다. 


바흐만은 유년 시절 세계대전을 겪었고 지독한 사랑의 후유증을 앓았다.

남성 중심의 오스트리아 문학계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며 살아갔던 바흐만은

전쟁 그리고 전쟁과도 같은 사랑 속에서 “유희”를 느꼈고, 추락을 겪었다. 

바흐만은 실제로 자유로운 여행을 하며 방랑자 같은 삶을 살았다. 

이문열 작가님의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속 불행한 과거를 지녔고 

어느 곳에도 정착하지 못했던 윤주처럼 말이다. 


바흐만의 윗 구절은 이카로스의 신화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고 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밀랍 날개를 달고 날아가다 추락하는 것을 이카로스의 추락이라 한다.

이카로스 신화는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태양에 타 죽더라도 한계를 뛰어넘는 도전을 높이 평가하는 것과 

인간의 끝없는 욕망으로 인한 타락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다. 


누구나 살다 보면 끝없는 추락의 순간을 경험한다. 

롤러코스터가 정점에 오른 순간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속도로 하강하는 것. 

그 가운데 평정심을 유지하는 건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롤러코스터의 안전장치처럼 나의 추락의 끝에 날개가 있다는 것을 잊지만 않는다면 다시 날 수 있는 것.

그게 내가 느낀 이카로스의 교훈이었다.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의 저자 장영희 교수가 말했다.

“하느님은 다시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넘어뜨린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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