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혼자가 아니야
급성기 병동, 특히 중증도가 높은 곳일수록 cardiac/respiratory arrest (심정지/호흡 정지)가 발생하는 빈도가 높은 편입니다. 미국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면서 정말 좋은 체계라고 느꼈던 것 중 하나를 이런 응급상황에서 느낄 수 있었는데요, 오늘은 그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간호사로 병동에 출근하면 두 가지를 부여받습니다. 환자 어싸인, 그리고 arrest 발생 시 오늘 나의 역할입니다. 각 병원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제가 일하던 곳은 병동 nursing station 근처에 학교 교실에 있을만한 크기의 화이트보드가 있었는데요, 거기에 각 간호사별 환자 어싸인 및 다른 중요사항이 적혀있었습니다. 그중 꼭 눈여겨봐야 할 것은 이번 듀티 때 (각자 담당환자에 관계없이) arrest 발생 시 '나'의 역할입니다. (주로 이전 듀티 차지간호사나 동일 듀티 차지 간호사가 정해놓습니다.)
Arrest 발생을 대비한 각 역할은 다음과 같습니다.
Arrest난 환자의 담당 간호사: E-cart를 끌고 환자 방으로 뛰어갑니다!!! (이때는 병동에서 뛰는 게 허용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달려가면서 차지에게 arrest 났음을 알리면 차지가 알아서 병원 전체에 'Code blue'를 띄워 원내 모든 의사들이 우다다다 뛰어오게 됩니다. (사실 차지는 이미 눈치를 채고 상황에 맞게 본인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차지선생님의 유능함을 깊이 깨닫게 되는 순간이죠.) 담당의나 attending physician이 오면 환자 상황에 대해 아는 대로 정보를 공유한 뒤 e-cart옆에서 어시스트를 합니다.
IV nurse: 라인 잡는 간호사입니다. Arrest 때엔 온갖 약물이 투입될 수도 있기 때문에 가급적 여러 IV를 최소 18G로 잡아두는 게 큰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환자 컨디션이 떨어지면 평소보다 정맥이 잘 안 보이기 때문에 (정맥이 숨는다고들 하죠) IV 난이도가 높아집니다. 그래서 주로 IV 스킬이 뛰어난 경력이 많은 간호사들이 배정되곤 합니다 (제가 있던 곳에서는 주로 일 잘하시는 한국 선생님들이 담당하시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정맥이 너무 안 보이면 결국 physician이 IO (intraosseous: 무릎 아래 tibia 뼈에 두꺼운 바늘을 박는 시술)를 하긴 하지만 아무래도 IV가 이미 있으면 허둥지둥하는 상황이 줄어들어 좋죠.
Runner: 환자의 방에 모든 응급 처치 기구가 있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이 경우 누군가 계속 왔다 갔다 하면서 필요 물품을 날라야 하는데요, runner가 그런 역할을 합니다. E-cart에 epi, amiodarone이나 NS 등 어느 정도 응급 시 필요한 것들이 많이 있긴 하지만 거기에 있던 물품을 다 써서 추가적으로 물건이 필요해진다던지, 아니면 ROSC 이후에 새로 들어가는 약물 때문에 IV pump가 더 많이 필요해지는 등의 이유로 무언가를 급히 가져와야 할 때 runner가 빛을 발합니다.
Recorder: Arrest는 급박한 상황이기 때문에 모두가 정신이 없습니다. 이때 Recorder는 환자와 cardiac monitor 그리고 진행되는 treatment를 모두 볼 수 있지만 필수 의료인력의 움직임을 방해하지 않는, 환자의 발쪽 자리에 있는 것이 좋습니다. 정신줄을 똑바로 잡고 종이와 펜을 이용해서 흘러가는 상황을 시간순으로 모두 기록합니다. 그래야 나중에 그 환자 담당 간호사가 상황 정리 후 사용 약물에 대해 의사로부터 오더를 받고 EMR기록을 남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단한 부담을 가지고 이 모든 것을 묘사할 필요 없이 정말 중요한 것들만 간결히 적습니다. 다음 예시를 보시죠.
0810: CPR 1st cycle, no ROSC, 1st epi IV push
0813: CPR 2nd cycle done, no ROSC, 2nd epi IV push, NS 1L bolus gi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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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20: ROSC, pt intubated (anesthesia called, MD name), versed 5mg IVP, vecuronium 6mg IVP, versed 10ml/hr IV start
BP 90/50, HR 64, RR 20, T 36.0
이런 식으로 중요한 정보만 기록하셔도 충분합니다. (기록을 넘겨받는 입장에선 이정도만 적어줘도 황송합니다.)
역할이 따로 정해지지 않은 간호사는 CPR에 참여하고 있는 간호사들이 담당한 환자들을 알아서 눈치껏 응대하면 됩니다. 특정 상황이 발생한 경우 (내 환자가 아닌 사람이 통증 때문에 약을 달라고 해서 assess 후 오더를 보니 PRN으로 통증 약이 있길래 있어서 통증 약을 하나 줬다던지 등) 나중에 CPR에 참여했던 간호사들이 돌아오면 그 간호사들에게 인계를 주면 됩니다.
내 환자가 stable 하다고 해서 나 혼자 손 놓고 노는 건 추천하지 않습니다. 언제 내가 담당한 환자에게도 arrest가 발생할지 모르는 일이고, 그때 나를 도와줄 수 있는 건 동료 간호사들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간호사가 도움을 요청했을 때 함께 돕는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저는 누가 제게 도와달라고 하면 너무 좋았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필요로 하고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는 능력이 된다는 게 어찌나 기쁘던지요!) 간호 업무라는 게 고되고 힘든 상황이 많지만 서로 도와가며 팀워크의 위대함과 즐거움을 여러분도 느끼실 수 있기를 바라며 이번 글을 마칩니다.
(커버 이미지: Photo by Nick Fewings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