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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빛 Jan 05. 2024

용감해지리라!

브루크너(오스트리아, 1824-1896)

    십여 년 전 대학교 졸업곡을 작곡할 당시에, 내 곡을 연습하던 금관악기 전공 선배가 나에게 금관악기가 너무 심심하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당시 오케스트라 선율 악기를 나에게 친숙했던 정도를 따져 나열하자면 현악기, 목관악기, 금관악기 순으로 말할 수 있다. 경험이 없어서, 소리가 커서 등의 복합적인 이유로 금관악기는 효과음 정도로만 사용을 했었다. 흔히 호른이라 불리는 '프렌치 혼' 솔로 선율을 넣었지만, 호른은 금관악기와 목관악기를 이어주는 부드러운 음색을 가지고 있어 거부감이 없었고, 무엇보다 매우 결정적인 부분에 삑사리가 나서 연주가 끝나고 호른 연주자가 허리를 거듭 숙이며 매우 미안해했던 기억이 난다. 문제는 트럼펫과 트럼본, 튜바 쪽이었다. 이 악기들을 직접 다루어보고, 솔로 곡을 듣고 어떤 음을 연주할 때 소리가 가장 예쁜가를 알 아야 멋지게 작곡을 할 수 있는데, 내게 금관악기 파트가 너무 심심하다고 말했던 금관악기 전공 선후배처럼, 금관악기와도 대면대면한 사이였다. 결국 졸업할 때까지 금관악기의 벽은 깨지 못했다. 아니, 깰 필요 자체를 못 느낀 것이다. 지금이라면 금관악기의 모든 것을 파고들어서 연주자들에게 뭐 이렇게 어려운 곡을 작곡했냐며 욕을 먹더라도 어떻게든 단물을 다 빨아먹어버릴 텐데 말이다.

    지금 이야기할 브루크너의 음악과 내가 그다지 친하지 않았던 이유는 첫째로 금관악기에 대해 경험과 관심이 없었고, 둘째로 곡의 길이가 내겐 좀 많이 많이 길었으며(말러 교향곡-1시간 보다는 덜 길어서 늘 감사하다), 마지막으로 시끄럽게 들릴 만큼 스케일과 음량이 크다는 점, 이 세 가지로 정리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나니 이런 부담들이 어느샌가 매력으로 다가오던 날이 있었다.

   

용감하다! 거침없다! 직설적인 관악기의 함성.

  

  뭐든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어느 날부터 브루크너의 시끄럽고 커다란 음악이 시원하고 광활한 바다의 음악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속이 답답해 시원한 음악을 찾았던 것일까, 아니면 내 마음이 더 이상 답답하지 않아 시원한 것을 즐기게 된 것일까. 마치 잔잔한 기타 반주에 소곤거리는 루시드폴의 '고등어'를 듣다가 비트와 일렉기타가 휘몰아치는 새소년의 '파도'를 들으면 속이 뻥 뚫리는 느낌을 받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브루크너의 교향곡 중 '낭만'이라는 부제가 붙은 곡이 있는데, 이 ‘낭만’이라는 단어는 지극히 주관적이어서 같은 카테고리로 분류되지만 '낭만'주의 음악의 원조격인 프랑스 작곡가 쇼팽과 리스트의 음악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보인다. 내가 사랑하는 작곡가 쇼팽은 인간 개인의 아름다운 인생과 그 낭만을 음악에 담았다. 만약 내가 인생의 고단함이 쓰나미처럼 몰려와 좌절감이라는 심해 속에 빠져든다면, 나의 구원책은 쇼팽의 '녹턴'이 될 정도로 그의 음악은 아름다움과 생명 그 자체이다. 이 아름답고 여리여리한 낭만을 담은 음악이 진부해지는 시기에, 브루크너는 기존의 낭만을 유지하되 색다른 시선을 가지고 인간의 용감무쌍하고 모험적인 낭만을 펼쳤다. '쇼팽의 낭만'과 '브루크너의 낭만'은 뿌리는 같지만 각자의 낭만을 음악에 담아 우리에게 외치고 있다.

    브루크너 교향곡을 들으면 험준한 산맥 위를 유영하는 독수리의 모습이 떠오른다. 내 발아래 온 세상이 있다! 으하하하! 뭐 이런 느낌이랄까. 작은 시냇물도 흐르고 깎아지른 절벽에 흑염소 한 마리가 아슬아슬하게 풀을 뜯고 있고, 큰 바위에 소나무가 기괴하게 자라있거나 갑자기 시야가 트이면서 바다가 나타나는 영화의 첫 장면처럼. 브루크너의 시선을 따라가려면 드론샷이 필수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다 큼직큼직한 것은 아닐 것이다. 클수록 내부의 작은 부품들이 잘 짜여있어야 넘어지지 않고 잘 버텨낸다. 그의 음악 속 구조는 튼튼하고 강한 대형 건물과 같으며, 시간에 음악이 얹히는 것이 아니라 음악이 시간을 박차고 앞서 나간다.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남발을 했지만, 나는 아직 브루크너를 잘 모른다. 이유는 명백하다. 많이 듣지 않아서. 이젠 더 이상 음악을 100퍼센트 업으로 하지 않게 되니 내가 좋아하지 음악도 한번 들어볼까? 하는 여유가 생겼다. 나는 아직 새로운 음악을 알아가는 중이다. 앞으로 알게 될 새로운 것이 아직 많이 남았다는 것에 감사하고 설렌다. 어릴 때 아빠와 한 대화가 생각이 난다.


나: 아빠, 나는 문제집에 답을 매길 때 꼭 동그라미의 끝을 맞추는 게 좋더라.

아빠: 그래? 아빠는 동그라미 끝을 안 맞추고 자연스럽게 놔두는 게 좋던데?    

나: 왜? 딱 맞춰야 예쁘지 않아?

아빠: 딱 맞추면 나올 곳이 없잖아. 자유롭게 나다닐 곳이 있는 게 더 좋지 않아?

나: 그래? 흠.(이해 못 한 초딩 -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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