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막하지만 생각한 것을 정리해 보았네요(D-30)
"내 다리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내 생각도 흐르기 시작한다"
미국 사상가이자 작가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글입니다.
문자를 통해 정년퇴직 인터뷰 때 필요한 내용을 전달받았지만 여전히 막막합니다.
제법 쌀쌀하지만 그래도 걷기에 정말 좋은 오후입니다.
집을 나와 낙엽이 수북이 쌓인 길을 사색에 잠겨 걷다 보니 역시 생각이 정리가 됩니다.
정리된 생각을 집에 돌아와 빠르게 정리를 해보았습니다.
- 첫 출근 당시 기억이 나시나요? 어떤 모습이셨나요?
"흥분과 설렘보다는 걱정과 불안이 더 앞섰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미 한 번의 신입사원 생활을 했었기 때문에 더 그랬던 것 같습니다. 과연 어떤 일을 할 것이며 잘 적응할 수 있을는지에 대한 걱정이 아니었을까 하네요."
- 그날의 나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으신가요?
"'생각은 짧게 행동은 빠르게, 일어나지 않을 일에 대한 걱정은 접어 두고 생활하라"라고 하고 싶습니다. 늘 앞날에 대한 걱정에 사로 잡혀 머뭇거리며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아니라고요. 어떤 일이던 시간이 지나면 해결은 됩니다. 그 결과가 좋던 나쁘던 간에요."
- 첫 업무를 떠올리면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서비스센터의 업무가 바쁘고 정신없는 일이라, 어떻게 업무를 배우고 적응했는지 모르는 사이에 어느덧 업무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회사 35년의 기반을 다졌던 시기가 아니었을까 하네요."
- 회사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두 가지를 꼽을 수 있는데요. 하나는 2000년 당시에는 생소했던 <위성&인터넷 방송국>을 설립하는 프로젝트를 맡아 우여곡절 끝에 완료하고, 방송국 오픈 행사를 하던 날로 기억합니다. 지금 생각해도 제 생애 가장 열심히 일했던 때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소위 요즘 말하는 영원까지 끌어다 완성한 프로젝트였습니다. 나중에 제 손으로 이 프로젝트를 접어야 했던 아픈 기억도 남아 있고요. 아직도 아쉬움이 남는 일 중 하나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남의 집 셋방살이를 하다가 우리 집을 마련해서 이전할 때가 아니었나 합니다. 자기 집을 첫 장만했을 때 기쁨을 아시는 분은 다 아시겠지만 그런 마음으로 현재 사무실을 마련했습니다. 장소의 물색, 보고와 결재, 그리고 공사의 진행과 완료까지 숨 쉴 틈 없이 관련 업무를 진행했었습니다. 공사가 모두 끝나고 이전하기 전 날 밤, 준비된 사무실과 작업장을 혼자 돌아보며 느꼈던 기쁨이 지금도 생생하네요."
- 당시에는 큰 일이었지만 지금은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매뉴얼의 특성상 '제조물 책임법'에 저촉되기 쉽습니다. 제조물 책임법은 크게 3가지로 구분되는데 '제조상 결함', '설계상 결함', 그리고 '표시상 결함'입니다. 그중 '표시상 결함'은 명백하게 글로 표현된 것이라 소비자가 결함의 원인을 입증하기가 상대적으로 쉽기 때문에 소송에 걸리기 또한 쉽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사용설명서에 경고 표시가 불분명하거나 부족, 또는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는 경우에 발생하기 때문이지요.
오타의 경우에는 창문을 항문으로 표기해서 신문에 난 적도 있었고요. 차에는 없는 기능을 넣어서 고객으로부터 기능을 넣어주던가 아니면 보상해 달라고 고발을 당한 적도 있습니다. 순정품을 사용하라는 권고를 넣었다가 공정거래위원회의 조사를 받고 제재를 받은 적도 있었네요. 가장 큰 사건은 미국 연방 자동차 안전 표준인 FMVSS에서 제시한 법규 문장을 임의로 삭제하여 징계를 받은 것입니다."
- ○○에서의 시간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회사에서의 35년은 압축 파일이다'라고 말하고 싶네요. 그렇게 생각한 이유가 세 가지인데요. 첫째로, 압축 파일이 여러 파일과 폴더를 담고 있듯이 회사 생활동안의 수많은 업무와 도전, 관계 등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입사 후 결혼하고 아이도 낳고 승진도 하고 이제 퇴사를 하는 35년의 긴 시간이 하나의 압축된 파일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둘째로는 압축 파일은 그 내용을 풀기 전에는 알 수가 없습니다. 제 머릿속의 압축 파일을 제 스스로 하나씩 풀어야 그 내용을 알 수 있으니까요. 세 번째로는 압축 파일의 특성상 일부 데이터가 손실되거나 손상될 수 있습니다. 간혹은 압축이 풀리지 않는 경우도 있고요. 아마 시간이 갈수록 이런 현상이 더 발생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어딘가 저장해 놓은 ○○이라는 압축 파일의 존재도 서서히 잊힐 것이라는 생각도 드네요. 서글픈가요. 아닙니다. 누구나 겪어야 할 일이니까요."
- 2026년 1월 1일, 어떻게 시작하고 싶으세요?
"아침 일찍 일어나 차갑지만 시원한 공기를 마시면서 가벼운 산책을 하고, 생각난 것들을 글로 옮길 것 같습니다. 그렇게 새로운 하루를 큰 변화 없이 맞이하고 싶습니다."
- 제2의 인생에서 꼭 해보고 싶은 도전이 있다면?
"지금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제대로 된 글쓰기를 하고 싶습니다. 글쓰기에 대해 체계적으로 배우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우연히 제가 쓴 글이 좋은 평가를 받아 VIP 작가로 선정되기도 했지만, 어디까지나 운이라 생각하고요. 아직도 부족한 것이 있다고 늘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생각이 정리되면 봉사 활동을 시작해 보고자 합니다. 늘 생각만 하고 있었지만 이제 시간과 여건이 허락되는 시점이 되었으니 시작을 해봐도 될 것 같습니다. 다만 시점은 아직 미정이네요.
지중해와 알래스카 크루즈를 꼭 해보고 싶습니다. 이번 퇴직 여행으로 싱가포르&동남아 크루즈 여행을 해봤는데 그때의 좋았던 기억과 추억이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씩 돈을 모아 아내와 함께 다양한 크루즈 여행을 해볼 계획입니다.
원래 이런 것은 머릿속에서만 여러 번 생각을 하고 발표를 하는 스타일인데, 글쓰기를 시작한 이후부터는 이렇게 써보게 됩니다. 확실히 글로 쓰다 보니 생각이 깔끔하게 정리가 되는 것이 느껴지네요.
"계속 쓰면 힘이 된다."라는 문구를 2024년 브런치 팝업 이후부터 키보드 위에 붙여 놓고 매일 보고 있습니다. 정말 허접한 글이라도 계속 쓰면 힘이 되는지 실험 중이기는 하네요.
드디어 내일이 인터뷰 날인데 잘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깊은 고민 없이 잠자리에 듭니다.
내일 일은 내일 고민해야지요~
오늘도 펭귄의 짧디 짧은 다리로 달리고 달리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