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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피소년 Nov 15. 2024

2-2 성난 바다

20코스(하도~김녕) 1


 비행기는 하얀 구름 위를 계속 날았다. 두껍게 덮인 눈으로 하얗게 끝없이 펼쳐진 남극 대륙 상공을 날고 있는 느낌이었다. 간혹, 구름이 엷어져 뚫린 구멍으로 바다가 보였다. 뭔가에 쫓기듯 바다는 점점이 파도들을 일으켜 급히 내뺐다. 파도로 인해 바다의 표면은 매우 거칠었다. 제주에 가까워졌는지 섬 하나가 보였다. 한림항 근처에 있는 비양도였다. 이번 올레는 15코스 시작점인 한림항에서 끝난다. 끝이 시간을 끌어당겨 시작에 자신을 붙였다. 걷기도 전에 다 걸어 이번 올레의 끝에 도착한 느낌이다. 끝내 해낼 것이라는 좋은 징후였으면 좋겠다. 제주 날씨에 대한 기장의 방송이 나왔다. 요약하면 강풍이 불고 매우 흐리다는 것이다.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 출구를 나오면 보이는 장승처럼 서 있는 야자수 나무들이 휘청이고 있었다. 바람의 세기가 시각적으로 느껴졌다.      


<비행기에 본 바다(좌)와 비양도(우)>

 출발 일주일 전에 제주 날씨를 검색했다. 첫째 날은 흐리고, 둘째 날은 흐리다 저녁에 비가 오고, 셋째 날은 온종일 비가 온다고 했다. 자기 예언에 대한 실현 같았다. 지난번 올레 글을 마치며 마지막에 이렇게 썼다.     

 

... 날씨 이야기도 해야겠다흐린 첫날을 제외하고는 날이 너무 좋았다날이 좋았기에 생각도 여러 방향으로 나갈 수 있었다그러나 다음번 올레는 날이 안 좋았으면 한다비가 올 듯 말 듯어두운 날이어도 좋다아니 비가 와도 좋다맞고 걷고 싶다맑은 날 걸을 때와는 다른 느낌감정생각들에 젖어들 수 있기 때문이다기대해 본다.     


 일기예보는 이때의 기대가 충족될 것임을 무덤덤하게 알려주었다. 그리고 제주 공항에서 맞이한 날씨는 그것의 가능성을 매우 높여 주었다. 비는 밤새 내리다 새벽에 그친 듯 도로는 물기를 잔뜩 머금은 흔적으로 축축했고, 바람은 나무를 휘청이게 할 정도로 강하게 불며 융융 소리를 냈다. 하늘에는 짙은 회색 먹구름이 무겁게 드리우고 있었다. 휴가로 가족과 놀러 왔다면 당연히 실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홀로 걷는 것이기에 상관이 없었다. 그런가 보다 했다. 길에서 날씨는 상수가 아니라 변수다. 변수이기에 날씨는 다양하고, 다양하기에 그런 날씨 속을 걷는 나에게 와닿는 느낌과 생각 또한 다양할 것이다. 그 다양한 느낌과 생각을 기대하며 그냥 걸으면 될 것이다.      



 101번 버스를 타고, 21코스 시작점이자 20코스 종점인 세화에서 내렸다. 올레 공식스토어에서 이번에 걸을 15~20코스 와펜을 샀다. 5월, 초보자인 나에게 올레를 걸을 때 주의할 점을 친절하게 알려주었던 안내원은 여전히 근무하며 나를 잊지 않고 기억해 주었다. 이번 올레도 성공하기를 바란다며 음료를 주었다. 감사했다. 20코스를 시작점을 향해 역방향(이번 올레는 전부 역방향으로 걷는다)으로 걷기 시작했다. 저번에 이른 점심을 해결했던 보말칼국수집이 보였다. 새벽에 김포공항에서 커피와 샌드위치로 아침을 간단하게 해결해서인지 배가 살짝 고팠다. 그러나 시간이 9시 40분이라 너무 일러 중간스탬프를 찍고 점심을 해결하기로 했다.  


<21코스 시작점에 있는 올레 공식스토어>

    

 조금 걸으니 세화 포구였다. 올레 공식스토어와 5분도 안 되는 거리인데도 여긴 다른 세상이었다. 올레 공식스토어가 있는 공간은 고요했다. 흐렸고 바람을 느꼈지만 바로 코앞의 공간에서 광폭한 풍경을 마주할 것이라는 어떤 조짐도 없었다. 갑자기 공간이 180도로 바뀐 것이다. 마치 나도 모르는 투명한 장막을 통과하여 다른 공간에 온 것 같았다.      


 세화 포구의 바다는 난폭했다. 이런 바다는 처음이었다. 그동안 내가 본 바다는 잔잔했다. 여행하기 좋은 날에만 바다로 갔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성난 바람과 그 바람이 바다로부터 일으킨 미친 파도를 보고 있다. 파도에 실린 세상의 모든 분노가 육지를 향해 달려들어 한꺼번에 폭발하고 있는 것 같았다. 포세이돈이 삼지창으로 파도를 일으키고, 파도는 성난 말들로 형상화되어 육지로 맹렬히 질주하다 포세이돈이 잡아당긴 고삐에 주춤하며 물러가고, 다시 풀리고 물러가기를 무한반복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여기에 바람과 파도 소리는 굉음이어서 세상의 모든 소리를 집어삼켰다. 바다의 색은 잿빛 회색이다. 색상이나 채도는 없고 오직 명도만 있는 무채색이지만, 명도의 밝음도 어둠도 드러내지 않기에 극단적인 내향적 색이다. 자신의 감정을 잘 숨긴 내향인이 끝끝내 참다 폭발하듯 화를 내면 어떤지를 바다는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았다. 파도는 육지를 뒤엎을 것처럼 밀려오다 도로의 벽면에 강하게 부딪히며 하얀 포말을 거칠게 도로에 쏟아냈다. 바다는 형상과 소리와 색으로 자신의 분노를 드러냈고, 난 그 난폭함에 압도당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는 압도된 풍경에 전율을 느끼며 바다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왜 나는 이런 풍경에 압도되는 것일까? 3코스 신풍신천바다목장에서 봤던 그 평화로운 바다에는 압도되지 않았다. 프리드리히의 ‘해변의 수도승’이라는 그림이 떠올랐다. 바다는 검다. 바다의 검은색은 수평선에서 스멀스멀 피어올라 하늘을 청록으로, 구름의 엷은 회색으로, 끝내 창백한 푸르름으로 물들었다. 이 거대한 풍경을 작은 수도승은 등을 보인 채 바라보고 있다. 자연에 대한 공포와 경외, 그 속에서 왜소한 인간의 절대고독이 느껴지는 그림이다. 그림은 정적이다. 바다는 고요하다. 그러나 바다가 드러낸 검은색에서 고요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검은색은 모든 색을 삼켜야 모습을 드러내는 색이다. 그래서 그 검은 바다에서는 고요가 아니라 모든 것을 파괴하려는 거칠고 들끓고 있는 욕망이 느껴진다. 그리고 세화 포구에서 그 들끓은 욕망이 실현된 바다를 보고 있다. 나는 이 바다에 압도되며 동화되고 있다. 어쩌면 내 안에도 뭔가를 파괴하고 싶은 강렬한 욕구가 있는 것은 아닐까?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 <해변의 수도승(Monk by the Sea)>, 1808~1810, 캔버스에 유채, 110×172㎝, 베를린 구 국립미술관>

 이런 바다에 대한 압도와 전율을 ‘대양감’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대양감’은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뛰어넘어, 자신이 외부 세계와 하나가 되는 신비로운 느낌을 말한다. 공간의 경계를 뛰어넘는 것을 융합(merging)이라고도 부르고, 시간의 경계를 뛰어넘는 것을 영원(timelessness)이라고도 부른다(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1991년에 개봉한 영화 ‘폭풍 속으로’의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다. 호수의 해변에서 보디(패트릭 스웨이지)를 잡은 존(키아누 리브스)은 보디를 풀어주고, 보디는 최악의 태풍으로 높아진 파도에서 최후의 서핑을 하기 위해 바다로 뛰어든다. 보디의 행동을 ‘대양감’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보디는 거대한 파도와 하나가 되어 공간을 넘어 융합되고, 그 속에서 죽음으로써 시간도 뛰어넘어 영원으로 넘어간 것은 아닐까? 나 또한 그러고 싶은 건 아닐까? 솔직히 잔잔한 바다보단 저런 폭발하는 바다에 더 끌린다. 그 역동성이 내 심장을 뛰게 한다. 어쩌면 나 또한 대양감이 내면에 있는지도 모른다. 


<영화' 폭풍속으로' 포스터 / 네이버 영화 참조>


 프로이트는 성인의 대양감을 성인 시절의 ‘버림받은 느낌’ 또는 ‘버림받은 위협’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성인 시절의 대양감 경험은 극도의 퇴행을 의미하며버림받은 느낌 혹은 버림받는 위협을 경험한 후에 흔히 나타난다이러한 경험은 압도적인 공격성의 위협에 대한 방어가 자기애적인 행복 환상과 공존한다는 점에서 신경증 증상과 유사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버림받은 느낌’과 ‘버림받는 위협’, 여기서 내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의 나와 대면하게 된다. 어쩔 수 없이 고3, 반 배정받는 날 자퇴를 해야 했고, 이후 몇 년을 어디에 소속되지 못하고 뿌리 뽑힌 채 살며 실존의 불안에 항상 파르르 떨던 그때의 나를. 그때의 시간은 이후 삶의 외양과 내면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지금의 나는 그때의 시간에 뿌리를 두고 있다.      


 올레는 이렇게 급습하듯 질문을 했고 나는 황망하게 대답을 찾아야 했다.     (2024. 10. 20)     


#올레 #한림항 #비양도 #바다 #파도 #세화 #대양감 #프로이트 #해변의수도승 #폭풍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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