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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odfire Jun 08. 2024

어린이가 되고 싶은 어른

오뉴월엔 개도 감기에 걸리지 않는다는데, 이런 계절에 나는 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하루 종일 감기 기운에 시달리다가 자기 전 테라플루를 하나 먹었다. 감기약 특유의 씁쓸한 맛이 싫어서 늘 피하고 싶지만, 달달한 테라플루는 감기 몸살에 최고의 선택이다. 어느새 30대 어른이 되어버린 나지만, 여전히 입에 쓴 약은 먹기가 싫다.


테라플루는 레몬맛과 베리맛이 있다. 두 제품 모두 꽤나 먹을 만하지만, 더 맛있게 먹고 싶은 마음이 내 안에서 피어났다. 결국 나는 테라플루 위에 달달한 아이스티를 섞어서 먹었다. 참으로 달달했다. 마치 카페에서 아이스티를 주문해 먹는 기분이었다. 평소 테라플루를 먹을 때 느껴지는 미묘한 약 맛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좋았다. 몸이 아픈 것도 서러운데, 이런 내게 쓴 것을 먹으라니 정말 부당한 처우가 아닐 수 없다.


옛말에 몸에 좋은 것은 쓰다고 하는데, 이러고 있는 나 자신을 돌이켜보면 아마 나는 몸에 좋은 것을 먹지 못할 팔자인가 싶다. 문득 환자분들이 어떤 정신과 약은 소다 맛이 난다고 했던 게 생각났다. 또 어떤 약은 쇠맛이 난다고도 이야기했다. 왜 먹기 좋은, 맛있는 약은 없을까? 어른이 되어서도 아이처럼 약을 먹기 힘들어하는 사람이 나 하나는 아닐 텐데 말이다.


호기심에 이것저것 검색해 보았다. 오렌지 향 같은 것을 시럽 제형의 약에 첨가해도 아기들은 약인 것을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뱉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테라플루에서 약 맛을 감지하는 내 입맛도 아기 입맛일까? 생각해 보니 나는 햄버거와 피자만 좋아하는 아기 입맛이라 자주 놀림받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극구 부인했지만, 이제는 아기 입맛임을 인정해야겠다.


계속 검색하다 보니 항생제와 같은 약들은 의도적으로 맛이 나쁘게 만들어져 있다는 말도 있었다. 이렇게 하면 잘못된 소비를 방지하고, 약을 오용하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맛있는 약이 나오지 않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내가 맛있는 약을 개발해 대박을 내려고 했는데… 아쉽다. 내가 생각한 그 맛있는 약은 결국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게 되었다.


어린이들은 약을 먹고 나면 달달한 사탕도 받고 칭찬도 받는다. 참 부럽다. 나는 맛없는 약을 씩씩하게 먹어도 아무도 칭찬해 주지도, 사탕을 주지도 않는데 말이다. 어른이 되면서 그런 작은 보상을 받을 기회가 점점 줄어드는 것이 아쉽다. 나이 들어간다는 것은 칭찬받을 일이 점점 없어지는 것일까? 누군가에게 칭찬을 듣고 싶은 나는 어쩌면 어린이가 되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른이 되어가면서 우리는 많은 변화들을 마주하게 된다. 그중 하나는 스스로에게 더욱 엄격해진다는 것이다. 칭찬을 받기 위해 어릴 때처럼 열심히 애쓰지 않게 되고, 때로는 스스로의 성취를 당연하게 여긴다. 하지만 감기에 걸려 약을 먹으며 다시금 떠오르는 것은, 우리는 여전히 칭찬과 다독임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하루하루 바쁘게 살아가다 보면 그런 생각은 잠시 잊히지만, 약을 먹으며 떠오른 이런 작은 생각들은 요 근래의 내 모습이 너무 팍팍하지는 않았는지 다시금 돌아보게 하였다.


그래, 어른도 어린이와 다르지 않다. 우리 어른들도 여전히 칭찬과 따뜻한 격려가 필요한 존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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