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 우울증이 심했을 때
나는 집안에서 누워만 있는 일이 잦았다.
누워서 하는 일은 대충 이런 것들이었다. 과거에 대한 반추,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걱정 등등. 또한 휴학을 해야 할지, 휴학을 한다면 그 후에는 무엇이 또 기다리고 있을지, 그리고 만약 휴학을 하지 않고 계속 학교에 다녔을 경우의 처참할 나의 성적.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머릿속은 복잡해져만 갔다. 이때도 아마 정신과 약을 먹고 있던 시기였지만 먹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라 뚜렷하게 눈에 보이는 효과가 나타나지 않아 그저 기다리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밤산책을 하는 것이 나의 하루의 마무리가 되었다. 처음엔 그저 찬 겨울 공기를 피부로 느끼고 싶었고 걷다 보니 겨울냄새가 좋았고 롱패딩 주머니에 양쪽 손을 넣고 천천히 걷는 게 왠지 모르게 안정감이 들었다.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아파트 단지를 몇 바퀴를 걸었다. 하루에 1시간을 내리 노래만 들으며 걷는 날들도 잦았다. 그러다 보니 기분이 좀 괜찮아졌나? 싶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노래 가사 덕에 위로도 많이 받게 되었다. 이런 날들이 많아지자 '오늘따라 나가기 귀찮은데' 하는 날에도 내가 나를 살리기 위한 심정으로 일단 밖으로 나갔다.
몇 주를 매일 그렇게 걷다 보니 문득 든 생각이 있었다. 기분은 걸음걸이와 비례한다는 것. 처음 산책을 시작했을 때 나의 걸음걸이는 누가 봐도 매우 느렸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거북이와 맞먹어도 지지 않았을 거다) 신기한 건, 내가 이 사실을 당시에는 깨닫지 못했었다는 것이다. 상태가 나아지고, 걸음걸이에 예전보다는 속도가 붙었을 때야 깨달았다. 얼마 전의 나의 걸음걸이와는 분명히 뭔가 차이가 있다고. 그 차이가 바로 속도였던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되는 걸까? 내 몸 전체를 통하는 에너지가 '생각'이라는 활동에 너무 많은 양을 써버려서 신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하는데에 쓰일 에너지가 부족해지는.. 우울증에 걸리면 평소의 행동들도 매우 느릿느릿해진다고 하던데 같은 맥락일까?
걸으면서 얻게 된 이 깨달음은 나의 상태를 파악하기 위한 일종의 도구로 사용되기도 한다. 걸음걸이가 너무 느리다는 걸 깨달으면 그 즉시 나의 정신상태에 대한 메타인지가 활성화된다. 혹시 나 또 가라앉고 있는 건가, 이번 가라앉음은 또 얼마나 지속되려나. 약간의 걱정을 동반하기는 하지만, 내가 나를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깨달음이니 어찌 됐건 쓸모 있는 깨달음일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