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에 대한 영역을 넓혀놓을 필요가 있다.
어떤 한 가지에서 좌절을 겪어도 다른 것으로 대피할 수 있게.
그 좌절에 내가 너무 무너지지 않게.
(여기서 말하는 '어떤 한 가지'는 내 통제 영역 밖의 것이다. 다시 시도해 보면 되잖아?라는 물음에 맞아, 그러면 되지!라고 대답할 수 없는 것. 즉, 내가 원한다고 해서 다시 시작할 수는 없는 것.)
알쓸인잡에서 심채경 박사님께서 하신 말이 있다.
가치 판단의 무게중심이 자신의 안에 있으면 안정적이라고.
그리고 '나'의 경계를 조금 희미하게 두는 것도 괜찮다고.
내가 나란 존재를 너무 촘촘히 가둬놓으면, 그 안의 무게중심을 잡는 것은 발레리나가 발끝으로 서 있는 것과 같은 거라고.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가두어놓는 나의 모습이라는 것이 무너지면 사람은 불안해지는 것 같다. 무너지는 것 또한 자신이 존재하기에 가능한 것임에도. 그리고 무너지는 자신의 모습에 대해 너무 부정하지 않아도 되는데도. 그런 나의 모습 또한 내가 마땅히 품어줄 수 있는 '나'임에도.
성취하는 '나'든 실패하는 '나'든 뭐 어때.
비슷한 맥락으로 사람은 '나'의 영역을 넓히면서 자신이라는 나무를 끊임없이 탐구하고 여러 가지(branch)를 뻗어놓을 필요가 있다. 어떤 특정한 것에만 몰두하거나 특정한 것만 계속 찾으려고 하면 시야가 좁아짐은 물론, 그 특정한 것이 무너졌을 때 너무 큰 심적 고통이 발생한다. 애정을 많이 쏟고 정말 그것만 팠던 사람이면 더더욱. 그러니까 간단히 말하자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많이 만들어두기. 어떤 한 애착대상(사람이든, 물건이든, 취미든)에 대해 좌절을 겪더라도 다른 것들로 안전하게 시선을 돌릴 수 있게. 나라는 존재까지 무너지지는 않게.
어쩌면 이러한 방법은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일지도 모른다. 어떻게든 내가 무너지진 않게 하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