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컥, 덜컥’
문 손잡이를 이리저리 돌려보는 관리자.
그러다 문을 확 잡아당겼지만, 다행히 문은 열리지 않았다.
간발의 차이로 걸쇠의 끝부분이 걸쇠 홈에 걸렸던 것이다.
“쓰읍, 망가진 거 같은데 잘 잠겨 있긴 하네. 본부, 본부, 여기 7층 45호인데, 도어록 전원이 나갔어. 일단 정비팀 보내줘 봐.”
‘휴우’ 조용히 한숨을 내쉬는 리.
“리, 일단 나가자. 이러다 걸리겠어.”
어느새 옛날 좀도둑이나 썼을 검은색 보따리를 등에 맨 채, 비토가 리를 채근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 든 파피루스를 접는 리.
집어넣으려 쌕 안을 정리하다가, 뭔가 떠올랐는지 갑자기 동작을 멈췄다.
“아!”
순간, 얼마 전 오발탄과의 원격 통신 장면이 떠올랐다.
복잡한 통신망을 일거에 건너뛰어, 마치 눈앞에 있는 것처럼 그와 연결됐던 순간 말이다.
“왜? 뭐 문제 있어? 얼른 나가자고!”
비토의 호들갑을 무시한 채, 다시 파피루스를 펼치는 리.
메일을 연 뒤 팝업창에 가만히 손을 가져다 댔다.
리의 손끝에서 가볍게 스파크가 튀었다.
눈을 감은 채, 그때의 기억들이 차례차례 떠올리는 리.
레이어 워치를 만지던 자신,
갑자기 눈앞을 지나가던 수천 장의 사진들,
그리고 나타난 오발탄의 커다란 얼굴.
“뭐 해? 얘, 진짜 눈치 없네. 얼른 도망가야 한다니까? 지금 오고 있다고! 갑자기 뭔 명상을 하고 난리야!”
그 순간, 리의 눈앞으로 수천 개의 문자들이 우르르 쏟아져 내렸다.
허공을 둥실둥실 떠다니는 문자들은 서로 결합했다 떨어지며 계속해서 이상한 글자들을 조합해 냈다.
우주를 유영하듯, 둥둥 떠다니는 문자들을 관통해 앞으로 나아가는 리.
그러다 앞을 가로막는 커다란 문자 무더기를 밀쳐내자, 눈앞이 번쩍하고 빛났다.
얼른 손으로 눈을 가리는 리.
잠시 뒤 손을 치우자, 그의 눈앞에 메일 창의 내용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발신자, SMOKER. 천계에서 새로운 희망자 미팅. 월운교, 오늘 해시(23~24시) 출발.”
눈을 감은 채 메일의 내용을 또박또박 읊는 리.
“뭐야, 보이는 거야? 이야~ 너 신기한 재주 있다!”
비토가 얼른 조막 만한 수첩을 꺼내더니, 리가 말하는 걸 받아 적었다.
‘탕탕탕!’
“안에 아무도 안 계시죠? 숙소 관리실에서 왔습니다!”
“없어, 없어. 내가 다 불러 봤어. 그냥 문 열고 고쳐. 일단 고쳐놓고 이야기하는 게 속 편하다고.”
그때 다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리, 왔어! 왔다고!”
눈을 번쩍 뜨더니 파피루스를 책상 위에 내려놓는 리.
“자, 가자!”
얼른 창문으로 뛰어가 창밖을 살폈다.
암형문이 위치한 광장은 사람 하나 없이 한적했다.
목에 걸쳤던 고글을 다시 쓴 리는, 곧장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다.
‘탈칵!’
그때, 걸쇠가 풀리며 문이 열렸다.
관리자들이 고개를 빼꼼히 내민 채 방 안쪽을 살폈다.
창문에 걸린 커튼만이 나른하게 하늘거릴 뿐, 방안은 미동도 없이 고요했다.
*
“띠리리릭! 띠리리릭!”
고글 화면에 일권의 얼굴이 떴다.
얼른 통화 버튼을 누르는 리.
“리! 시방 워디?”
“네, 오발탄의 숙소에서 막 나왔어요.”
“뭣 좀 찾은겨?”
“네, ‘스모커’라는 작자가 오발탄에게 만나자고 메시지를 보냈더라고요. 해시, 월운교에서.”
“스모커? S, M, O, K, E, R, 스모커?”
“네, 그거 맞아요.”
“스모커는 금운신의 석공들을 부르는 은어인디. 일 할 때 먼지가 허벌나게 난다고 혀서.”
허공을 가르며 날고 있는 리.
고글을 쓴 비토가 리의 목뒤에 앉아 조종하는 흉내를 내고 있었다.
“석공이라면 계를 보수하고 계와 계를 연결한다는 난쟁이들 말이죠?”
“워얼, 미스터 리. 환생관리사 다 되았네. 아는 것도 생겨불고.”
“석공들이 오발탄을 왜 만나려고 했을까요?”
“뭔가 거래를 하지 않았을까 싶은디. 석공들은 그 능력 땀시 뒤에서 브로커 짓도 많이 하거든.”
어느덧 저녁이 가까워져, 쌍둥이 해가 번갈아 가며 수평선 밑으로 내려갔다가 올라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때마다 주홍빛 석양이 부드러운 비단 조각처럼 일렁거렸다.
“잉, 그라믄 얼추 아구가 맞네. 나도 찾아부렀쟤, 싸우는 벽화가 그려진 ‘La Catedral de la luz’말여. 역시 나의 기억이 맞았어. 명천계에 있는 ‘빛의 대성당’ 이드만. 천계의 영혼들을 만나러 ‘일자(一者)’께서 가끔씩 내려오신다는.”
“일자요? 일자가 누구죠?”
“잉? 워째 잘 나간다 했드만, 쯧쯧쯧. 신 중의 신! 모든 신들의 아부지! 모든 계의 지배자이자 명천, 암형, 중간, 환생, 분열 5계를 손수 맹근 신. 이런 것도 알려줘야 쓰것냐. 진짜 역사 공부 안 헐래?”
“아, 일자... 그렇군요.”
“쯧쯧쯧. 하여간 뭔 수를 썼는지 모르것지만, 니가 본 게 맞다믄 오발탄은 시방 명천계에 있는 거여. 석공이랑 연락하는 거 보니께, 어디에 개구멍 같은 걸 뚫어 논 모양이구먼.”
그때, 갑자기 새 한 마리가 리의 앞으로 훅 달려들었다.
“웁스!”
얼른 곡선으로 경로를 틀며 새를 피하는 리.
비토가 고글을 벗더니 새를 향해 막 ‘뭐라 뭐라’ 손가락질했다.
“워쨌거나, 그 메일 갖고는 부조게. 더 확실한 증거가 있어야 한당께. 오발탄을 잡는 게 젤로 확실헌디, 그럴라믄 우덜도 천계로 들어가야 허고. 하, 워째쓰까. 상부에 허가도 받고 천계의 협조도 얻을라믄 닷새 갖고는 택도 없는디...”
“뭐, 선택지가 없네요.”
“뭔 방법이라도 있능가?”
“스모커라는 작자를 이용하는 수밖에.”
“스모커를 이용해야? 그놈이 리 같은 초짜한테 넘어올 리가 있간디?”
“생각이 있어요. 저한테.”
“그랴? 뭐, 딱히 다른 방법이 없응께, 잘 구슬려 보드라고. 그럼 조심허고, 뭔 일 있음 바로 연락...”
‘띠릭’, 인사도 다 듣기 전에 연락을 끊어버리는 리.
일권의 얼굴이 사라진 고글 화면에, 내비게이션 화살표가 반짝거렸다.
“월운교 10km라...”
‘휘잉’ 속도를 더 높이는 리.
그가 지나간 길을 따라 미세하게 번개가 지직거렸다.
*
‘개골개골, 개골개골’
중간계에 어둠이 깔리자, 월운교 아래로 개구리 하나가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행여 천적이라도 등장할까, 개구리는 눈을 좌우로 굴리며 연신 주변을 경계했다.
‘풍덩’
그때 다리 위에서 돌덩어리 하나가 날아왔다.
개구리가 얼른 시냇물 속으로 몸을 숨겼다.
“염병헐 거, 조용히 안 허냐!”
한 난쟁이가 다리 난간에 기댄 채, 돌멩이를 치켜들고 있었다.
은색 두건에 회색 작업복을 입은 그는, 잔뜩 인상을 쓴 채 연못 아래를 노려봤다.
그의 허리춤에 달린 목 짧은 해머가, 그가 움직일 때마다 덜렁거렸다.
더는 개구리가 나타나지 않자, 바닥에 돌을 던지고는 손바닥을 터는 난쟁이.
난간에 등을 대고 기대, 천천히 좌우를 살폈다.
달빛이 환하게 내리쬐는 월운교 주변은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이 한적했다.
가끔 ‘찌르르르’ 울어대는 귀뚜라미 소리만이, 한밤의 적막함을 달랬다.
“슬슬 나타날 때가 됐는디.”
발뒤꿈치로 다리 난간을 툭툭 치며 지루해하는 난쟁이.
‘투둑.’
그때, 반대편 다리 끝으로 무언가가 내려섰다.
난쟁이가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며 몸을 일으켰다.
환생 관리자 복장의 남자가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는데, 오발탄과는 뭔가 느낌이 달랐다.
비슷한 복장이었지만 목에 못 보던 하늘색 스카프를 두르고 있었고,
키는 크고 덩치는 호리호리한 게 오발탄의 분위기는 아니었다.
일이 틀어졌음을 직감하고 왼쪽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난쟁이.
티 나지 않게 해머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당신이 스모커인가?”
남자가 천천히 난쟁이에게 다가오며 소리쳤다.
“당신이 스모커 맞냐고?”
“어이, 여그여, 여그!”
그때, 난쟁이가 남자 쪽이 아닌 엉뚱한 쪽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남자가 뭔가 싶어 그쪽을 돌아봤지만, 나무들만 가득할 뿐 아무도 없었다.
인상을 쓰며 다시 난쟁이를 돌아보는데, 순간 해머 하나가 ‘핑그르르’ 회전하며 남자의 얼굴을 향해 날아들었다.
“헉!”
남자에게 해머를 던진 난쟁이는, 바로 난간을 넘어 다리 밑으로 뛰어내렸다.
상황이 틀어질 걸 대비해 미리 뚫어둔 둔 포털로 도망칠 생각이었다.
“젠장, 오발탄 이 멍청... 어, 어라?”
뛰어내리며 다리 밑을 살피는데, 갑자기 자신의 몸이 붕 떠오르는 게 느껴졌다.
이리저리 발을 구르며 달아나려 했지만, 몸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러다 훅 하늘로 끌려 올라가더니, 원반 던지기의 원반이라도 된 듯, 허공을 빙글빙글 대여섯 바퀴 돌았다.
눈앞에서 세상이 어지럽게 뒤엉켰다.
“왐마! 살려줘!”
난쟁이가 자지러질 듯 고함치자, 이내 천천히 회전이 멈췄다.
월운교 위 상공에 거꾸로 매달린 채, 난쟁이가 고개만 빙글빙글 돌렸다.
“금운신의 석공들은 난쟁이라더니, 진짜구나.”
난쟁이가 매달린 다리 한가운데로 걸어오는 남자.
그는 난쟁이를 향해 손바닥을 펼쳐 들고 있었다.
그의 다른 손엔 난쟁이가 던졌던 해머가 들려 있었다.
정신을 차리려 좌우로 고개를 세차게 흔드는 난쟁이.
눈을 몇몇 깜빡이자, 자신의 앞에선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갑자기 울컥 신경질이 났다.
“시방, 뭐 더는 짓이여, 얼른 안 내려놓냐!”
“아니, 그러게 묻는 말에 대답은 안 하고, 왜 해머를 던지고 난리냐고.”
“이 자슥, 너 내가 누군지 알고 이 지랄인겨? 퍼뜩 안 내려놓냐!”
“당신이, 스모커 맞지?”
남자가 묻자, 순간 입을 다물며 남자를 쏘아보는 난쟁이.
“하아, 참. 나 오발탄 선배가 보내서 온 사람이야. 오늘 명천계에서 새로운 지원자 미팅한다며.”
“오발탄이, 보내야?”
“그래, 선배가 갑자기 상부로 불려 가서 나한테 일 처리를 맡겼다고. 그냥 뭐 미팅만 하고 오면 된다며.”
“...”
여전히 못 믿겠다는 듯, 계속해서 남자를 노려보는 난쟁이.
“흠... 일단 나부터 내려.”
“안 도망갈 거지? 서로 피곤하게 그러지 말자고.”
남자는 천천히 난쟁이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난쟁이는 바닥에서 일어나 몸의 먼지를 털었다.
그러면서도 남자를 향한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그 빠꼼이가 ‘환생 여행’에 대해 말해줬다고? 이거 엄연히 불법인디?”
“선배 하고 나하고는 아삼육이거든. 이를테면 뭐 ‘운명 공동체’ 같은 거지.”
“그 인간이 천계환을 나눌 리가 없는디?”
“천계환... 아, 나, 참...”
남자가 한숨을 쉬더니 장비 쌕을 앞으로 돌려맸다.
그걸 보고 난쟁이가 움찔하자, 남자가 얼른 팔을 뻗으려다가 인상을 쓰며 멈췄다.
“하, 거참, 피곤하게 구네. 자 이거 봐봐, 이거. 선배가 안 그래도 당신이 안 믿을 거라고, 이걸 줬어. 선배가 환생시킬 때 사용하는 열쇠라고. 자, 봐봐.”
남자가 에메랄드빛 열쇠를 손에 든 채 다가오려 하자, 난쟁이가 또다시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하, 진짜 엄청 피곤한 스타일이네. 자자.”
난쟁이의 발밑에 열쇠를 던져주는 남자.
난쟁이는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열쇠를 집어 들었다.
사용법을 이미 아는 듯, 난쟁이는 열쇠의 머리 부분을 꾸욱 눌렀다.
그러자 열쇠에서 레이저가 나오더니 바닥에 글자가 만들어졌다.
“열쇠 발급자 및 소유자, 오발탄. 킁.”
글자를 읽으며 입을 비죽거리는 난쟁이.
분명 오발탄의 것이 맞았다. 맞긴 분명히 맞는데, 이런 일에 대타를 내보낸다는 게 여전히 찜찜하긴 했다,
“아씨, 진짜, 그걸 보고도 이러기야? 그거 본인 아니면 안 주는 거 몰라? 아씨, 진짜, 하지 마, 하지 마! 나도 피곤해 죽겠는데, 그냥 선배가 간단한 거라고 하길래 귀찮아도 해주려 했더니, 안 해, 안 해! 에이, 퉤!”
짜증스럽게 손사래를 치며 돌아서는 남자.
쳐다보지도 않고 손을 흔들며 난쟁이에서 멀어져 갔다.
그러자 난쟁이가 종종거리며 달려와 남자의 손에 든 해머를 낚아챘다.
“아! 아프잖아!”
“오케 오케, 거 참을성 겁나 없는 친구 구마. 성질 드러운 거 하나는 오발탄이란 판박이네.”
해머를 한 바퀴 빙그르르 돌려 잡더니, 허리에 거는 난쟁이. 그리곤 남자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자, 오해를 푸는 의미로다 악수나 하자고. 나 이름은 뭉치여. 이 바닥서 가장 실력 있는 스모커쟤.”
“아, 나, 진작 그럴 것이지.”
남자도 허리를 숙인 채 난쟁이, 아니 뭉치의 손을 맞잡았다.
“내 이름은 ‘마스터’ 리. 만나서 반가워.”
서로의 손을 맞잡은 두 사람은, 악력테스트라도 하듯 잠시 손에 힘을 주었다.
덩치에 비해 석공의 손아귀 힘은 대단했다.
“자네, 재미진 능력을 가졌구마. 앞으로 종종 볼 일이 있겄어. 자, 시간을 많이 허비했응게 후딱 가자고.”
월운교를 돌아 다리 밑으로 내려가는 뭉치.
그의 뒤를 졸졸 따라가는 리.
그때까지 스카프 안에서 조용히 숨어있던 비토가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마스터’ 리래. ‘풋’ 기껏 둘러 댄다는 게.”
“쉿!”
손가락으로 얼른 입술을 가리는 리.
비토가 입을 막은 채 소리 없이 웃었다.
월운교 아래, 아치형 공간으로 들어간 뭉치는, 다리 기둥을 이루는 돌멩이들을 하나하나 손으로 문질렀다.
그러다 특정 돌멩이에서 멈추더니, 잠시 리를 돌아다봤다.
여전히 그의 눈에는 망설임이 남아있었다.
‘뭐, 왜?’라는 의미로 어깨를 으쓱거리는 리.
‘킁’ 콧방귀를 내쉰 뭉치는, 이내 돌을 ‘꾸욱’ 눌렀다.
그러자, 돌멩이들이 하나하나 좌우로 갈라지더니, 돌멩이 뒤로 ‘검은 막’ 같은 게 드러나 일렁거렸다.
리는 그게 뭔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색깔만 달랐지 환생의 문에서 봤던 포털과 동일한 것이었다.
계와 계를 잇는 포털은 석공이 만든다더니, 사실인 모양이었다.
“자, 그럼 가보까나. 명천계로.”
뭉치가 리를 보며 윙크를 하더니, 포털 속으로 거침없이 뛰어들었다.
그걸 보고 역겨운 듯 비토가 헛구역질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