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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 천계는 만원(滿員)

by 무딘

“웰컴 투더 헤븐!”


바위 위에 올라서자, 비로소 천계의 광활한 도심이 눈앞에 쫙 펼쳐졌다.

장애물 하나 없이 탁 트인 하늘 아래, 평평한 대지가 수평선 끝까지 이어졌다.


격자로 구획 지어진 거대한 평지 위로, 나지막한 건물들이 바둑판 위 돌처럼 말끔하게 늘어서 있었다.

평지 중앙쯤 자리한 오벨리스크와 중세 고딕풍의 뾰족한 성당만이, 그나마 높은 건물이라면 건물이었다.


오벨리스크 끝에선 초록빛 오로라가 신비롭게 피어올랐는데, 하늘로 올라간 오로라는 점점 색을 잃으며 비단 모양의 구름과 합쳐졌다.


“저기가 ‘빛의 대성당’인가?”


리가 성당 쪽을 가리키며 묻자, 브로커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긋이 이를 깨무는 리.

비토가 디카 같은 걸 꺼내 들고 열심히 천계의 모습을 촬영했다.


“이렇게 보니 장관이긴 하네.”

“킁, 여기서 보면 그라쟤. 본디 인생은 멀리서 보믄 희극, 가까이서 보믄 비극인겨.”


어느새 바위 위에 올라선 뭉치가 콧구멍을 후비며 말했다.


“이걸 보니 더 이해가 안 되는데. 어렵게 천계까지 왔으면서 왜 다시 환생하려는 거지?”


브로커가 먼저 내려가자, 뒤따라 바위를 내려오며 묻는 리.


“한 마디로 지겨운 거 아니겄어? 암만 좋은 것도 계속 반복되믄 시들시들 해 불지. 천계서 만날 배부르고 등 따숩게 지냉게, 사는 게 지겨워진 거여. 그걸 ‘권태’라고 부릅디다. 니미, 넘 지루하믄, 그것도 고통이랑게.”

“‘인생은 쾌락과 권태 사이를 오가는 시계추’라 했죠. 누가 말했더라...”

“인자 두 눈으로 곧 보겄지만, 지금 천계가 말이 아니여. 지내기가 예전 같지가 않당게. 그라니 다덜 일탈을 꿈꾸는 거여. 환생 여행이든 뭐든 간에.”


여전히 수긍이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리.


“이런 일들이 자주 있나 보지?”

“심심치는 않쟤. 그나저나 자네 궁금한 게 겁나게 많구마. 자네 일이나 똑바로 햐. 많이 알믄 다쳐붕게.”

“쉿!”


인상을 쓰며 검지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대는 브로커.


“자, 여기서부턴 목소리들 낮춰요. 공간이 자극되면 천계병들이 득달같이 달려올 테니까. 외부인들이 내는 목소리는 파장부터가 달라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뭉치와 리.

비토도 덩달아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조금 더 걸어 내려오자 마침내 언덕으로 이어지는 길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잘 정비된 인도와 건물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후드를 머리까지 눌러쓴 리는 눈을 좌우로 굴려 가며 천계의 모습을 관찰했다.


가까이서 보니 신기하게도 건물들 대부분이 벽이나 지붕도 없이 기둥과 보만 연결된 단층 건물이었다.

공사가 덜 됐거나, 아니면 그냥 ‘여기까지가 내 집이야’라고 성의 없게 표시하는 것처럼.

고양이들이 기둥 위에 배를 깔고 누워 꾸벅꾸벅 졸았다.


리가 ‘지붕은 어디?’라는 의미로 손바닥을 머리 위에서 흔들자, 브로커가 리를 향해 몸을 기울이며 나지막이 말했다.


“이곳엔 지붕 같은 건 없어요. 비나 눈이 오지도 않고, 바람이 불지도, 춥지도 않으니까요. 환생계처럼 남의 눈 의식할 필요도 없으니, 굳이 벽도 쌓지 않죠.”


건물 사이로 뻗은 길을 걸으며, 건물 안쪽을 들여다보는 리.

삼삼오오 모인 영혼들이 깔깔거리며 이야기를 나눴고,

둥글게 둘러앉은 영혼들은 서로의 눈을 보며 악기를 연주했다.


따사로운 햇볕 아래서 한가로이 담배 같은 걸 피는 영혼들도 많았고,

커다란 파피루스를 스크린처럼 펼쳐놓고 박수를 처가며 영화를 즐기는 영혼들도 여기저기 보였다.


“히야, 백수들이 따로 없구만. 이 대낮에 일 안 하고 저렇게 농땡이를 부릴 수 있다니.”


비토가 리의 후드 속에서 머리를 빼꼼히 내민 채 말했다.


“쉿! 조용!”


리가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며 비토를 제지했다.

그러자 브로커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잠시 리를 쏘아봤다.


그렇게 한 50여 미터 걸었나,

한번, 두 번, 영혼들과 어깨가 스치나 싶더니, 어느 시점부터는 본격적으로 영혼들과 부딪히기 시작했다.


“응?”


뭔가 싶어 집 관찰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새 인도가 영혼들로 빽빽했다.

영혼에 가려져 길 앞쪽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마치 출근길 환승역 안을 걷는 것처럼, 한 걸음 내딛는 것도 쉽지 않았다.


“와, 이게 뭐야. 영혼들이 왜 이렇게 많아?”


리가 눈썹을 치켜뜨며 물었다.


“여기부터 이제 쭉 이럴 거예요. 중앙 광장 쪽이랑 더 가까워졌거든요.”

“킁킁, 지난번 왔을 때보다 더 심해졌구마. 영귀풀 피는 냄새도 지독해 불고.”


뭉치가 코를 막으며 투덜거렸다.

인도가 좁지도 않은데 워낙 많은 영혼들이 우르르 걸어 다니니, 속도를 내기가 무척 어려웠다.

이제 보니 한집에 있는 영혼의 수도 처음과는 달리 매우 많았다.

꼭 한 공간에 여러 명이 거주하는 교도소 감방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거 의왼데. 이 정도로 붐빈다면 차라리 환생계가 더 편하겠어.”

“영귀풀 말은 거 개당 2 백령! 영귀풀 말은 거 개당 2 백령!”


리가 혼잣말하는 사이, 기둥을 붙잡고 선 영혼 하나가 작은 상자를 흔들어 대며 행인들을 향해 소리쳤다.


“휴우우, 그렇죠, 엉망이죠. 천계는 이미 만원(滿員)이에요. 한마디로 포화상태죠. 이렇게 된 지 한참 지났는데도, 끊임없이 영혼들이 밀려들고 있어요. ‘저런 사람들까지 영생을 보장받아야 하나’ 싶은 하찮은 아줌마, 아저씨들이 계속 밀고 들어오는데, 이 꼴이 안 나겠어요.”

“그럼 안 받으면 되잖아. 심판을 더 엄격히 해서.”

“저야 그러고 싶죠. 하지만 일자께서 좀 관대하셔야죠. 아무리 개차반 같이 살았어도, ‘자격’만 갖추면 심판 없이 그냥 패스예요. 영리한 인간들이 그 허점을 캐치하고 악용하는 거죠.”

“자격이라... 자격이라면 어떤 자격?”

“뭘 묻는당가. ‘믿음’이쟤. 일자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 자자, 미안허요, 좀 갑시다.”


키 작은 뭉치가 답답했는지 사람들을 밀치며 앞으로 나갔다.

뭉치 덕에 두 사람도 조금 더 속도를 올릴 수 있었다.


“영귀풀 말은 거 개당 2 백령! 영귀풀 말은 거 개당 2 백령!”


명천계에 대해 환상을 품고 있었던 리는, 천계의 이런 현실이 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낙원이라고 생각했던 천계가, 이렇게 대낮 시장통 같다니.


“근데, 천계는 무한하지 않나? 영혼들로 붐비면 공간을 더 넓히면 되잖아.”

“킁, 아까부터 자꾸 순진한 소리 할라요. 무한이 어딨당가. 시작이 있음, 끝이 있는 거쟤. 이미 허벌나게 넓은디, 영혼들이 줄창 들어오기만 하고 나가덜 않응게, 감당이 안 되는 거여. 여그도 사람 사는 데라고, 좋은 자리는 니미 코딱지만한디 욕심은 끝이 없응게 이 지랄 나는 거 아니겄어? 배도 안 고픈 천계에 돈 같은 게 다 생겨 불고.”


‘푸더덕!’


그때, 일행의 머리 위로 백마(白馬) 한 마리가 날개를 펄럭이며 지나갔다.

말에는 하얀색 갑옷을 입은 천계병이 창을 치켜든 채 앉아 있었다.

백마를 보자마자, 물건을 팔던 영혼들이 잽싸게 집안으로 몸을 숨겼다.


“어? 천계병이 왜 갑자기...”


불안해진 브로커가 발끝을 들고 행렬 앞쪽을 쳐다봤다.

아니나 다를까 앞쪽에서 천계병들이 영혼들을 하나하나 검문하고 있었다.


“에이, 귀찮아졌군요.”

“뭐여? 검문이여?

“네, 육안 점검 정도 하는 걸로 보이니까, 괜찮을 거예요. 모자나 잘 덮어쓰세요.”


뭉치와 리의 옷매무새를 다시 만져주는 브로커.

행렬이 앞으로 움직이며 세 사람도 천계병 쪽으로 조금씩 다가갔다.


앞으로 이동할 때마다 천계병의 모습이 더 명확히 보였다.

도자기 색 바탕에 금색 문양으로 수놓아진 갑옷이, 히어로의 갑옷처럼 꽤나 멋스러웠다.


천계병들은 영혼들을 위아래로 ‘스윽’ 훑고는 그냥 지나가게 뒀는데, 딱 봐도 엄격한 검문처럼 보이진 않았다.

그걸 보고 ‘휴우’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는 리.

천계병의 뒤로 멀리 대성당과 오벨리스크의 꼭대기가 살짝 보였다.


“오발탄... 저기에 숨었단 말이지.”


미간을 찌푸리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는 리.


“저기요.”


그때, 누군가가 리의 등을 톡톡 건드렸다.

‘응?’ 놀라 뒤를 돌아보는데, 어린아이 하나가 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딘가 낯익은 얼굴의 아이는, 리를 향해 에코백 같은 걸 내밀고 있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아이를 살피는 리.

가만히 보니 아까 영귀풀 밭에서 눈이 마주쳤던 그 아이였다.

검은 머리를 허리까지 땋은 여자아이.

아이는 리를 보며 에코백을 계속 흔들어 댔다.


“아저씨, 이거!”

“응? 뭐, 나보고 받으라고?”


아이가 재촉하자, 엉겁결에 에코백을 받아 드는 리.

안쪽을 슬쩍 보니 영귀풀이 무더기가 잔뜩 들어 있었다.


“아저씨 미안! 휘리리릭!”


리가 에코백을 받아 들자마자, 아이가 휙 돌더니 호루라기를 불며 냅다 도망쳤다.

리는 순간 멍해져서, 영혼 무리를 헤치며 달아나는 아이를 그저 바라보기만 봤다.


“뭐?”


호루라기 소리를 듣고, 앞서가던 브로커가 얼른 리쪽으로 뛰어왔다.

리의 손에 들린 에코백을 보더니, 얼굴을 확 찡그렸다.


“젠장, ‘미끼질’ 이예요!”


얼른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브로커.

호루라기 소리를 들은 천계병들이 어느새 리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어이, 거기! 잠깐 서봐!”


리에게서 에코백을 빼앗은 브로커는 에코백을 행렬 뒤쪽으로 ‘휙’ 던져버렸다.

뒤에서도 호루라기 소리를 들은 천계병들이 리를 향해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젠장, 뜁시다!”

“염병할, 뛰어!”


갑자기 행렬을 이탈해 길가 옆, 집 안으로 무작정 뛰어드는 브로커.

그를 따라 뭉치와 리도 덩달아 집 안으로 뛰어들었다.

집에서 여유롭게 노래 부르며 놀던 영혼들이 화들짝 놀라 한쪽으로 몸을 피했다.


“뭐시여? ‘미끼질’이 뭔데 그랴?”


짧은 다리로 껑충껑충 뛰며 묻는 뭉치.


“미끼한테 시선을 돌려놓고 다른 길로 영귀풀을 반입하는 거예요. 재수 없게 우리가 낚였어요.”


‘쾅!’


그때, 브로커 바로 옆쪽 기둥에 흰색 창이 박혔다.

리가 슬쩍 돌아보니 천계병이 던진 창이었다.


“인자 워쩔텨? 계속 쫓아 와불믄!”

“이대로 쭉 뚫고 가서 천계 광장까지 가면, 거기에 ‘빛의 대성당’이 있어요.”


순간, 푸쉬업을 하는 영혼을 아슬아슬하게 뛰어넘는 브로커.

뭉치와 리도 덩달아 그를 뛰어넘었다.


“오, 쏘리! 거기는 성전(聖殿)이라 군병력 출입 금지니까, 하아하아, 일단 거기로 피하죠!”

“망할, 워째 시작부터 꼬이드라니.”

“자, 저쪽으로!”


집에서 다시 빠져나오는 브로커.

영혼 행렬을 가로지른 뒤, 반대편 집으로 뛰어들었다.

뭉치와 리도 그를 따라 정신없이 뛰었다.

‘끼야악!’, ‘아악’ 이들에 부딪힌 영혼들이 짜증스럽게 고함을 질렀다.


“으악!”


두세 채쯤 건넜을까.

다음 집으로 넘어가려는 찰라, 어린아이 하나가 뭉치의 앞으로 갑자기 튀어나왔다.

아이를 피하려 뒤늦게 몸을 틀었지만, 발이 의자에 걸리며 넘어지고 마는 뭉치.

데굴데굴 바닥을 굴러 기둥 아래 처박혔다.


“뭉치씨!”

“뭉치!”


먼저 지나갔던 브로커와 리가 동시에 속도를 죽이며 외쳤다.

얼른 돌아와 쓰러진 뭉치를 일으켜 세우려는데,

어느새 뒤쫓아 온 천계병 하나가 몸을 날려 두 사람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잡았다! 이 쥐새끼들!”


뒤따라온 또 다른 천계병도 뛰어들어 두 사람의 허벅지를 붙잡았다.


“포박 그물! 쏴!”


허리를 붙잡은 천계병이 고함치자, 뒤따라오던 다른 천계병들이 뒤엉킨 이들을 향해 총을 쐈다.

‘푸확’, 5미터는 넘어 보이는 커다란 그물이 아가리를 쫙 벌리며 이들에게 날아들었다.


햇볕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황금색의 그물. 이대로라면 꼼짝없이 그물에 붙잡힐 판이었다.


“하아, 젠장, 망했네요. 하아, 하아,”


피해 보려 이리저리 몸을 움찔거리다, 결국 고개를 떨구는 브로커.


“오늘은 날이 아니었는 게비, 후우, 후우. 워매, 옆구리 아픈 거.”


바닥에 엉거주춤 주저앉은 채, 옆구리를 붙잡으며 인상을 쓰는 뭉치.

실패를 직감한 채, 두 사람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오케이!”


포박총을 쏜 천계병이 승리를 확신하며 주먹을 움켜쥐는 순간, 갑자기 리의 눈이 ‘번쩍’하고 빛났다.


초록빛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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