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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 브로커

by 무딘

명천계 도심 외각의 나지막한 언덕.


이름 모를 초록 풀들로 가득한 언덕 한쪽에, 코끼리 모양의 커다란 돌덩이가 자리 잡고 있었다.


돌덩이 위로는 옅은 푸른색 하늘이 드넓게 펼쳐졌는데,

비단 같은 구름이 얇게 드리워져, 한 번씩 우아하게 일렁거렸다.

구름이 일렁거릴 때마다 싸라기눈 같이 하얗고 미세한 조각들이 허공에 흩날렸다.


돌덩이 등 위에서 열심히 이끼를 쪼아 먹는 새들.

‘두드드드’ 갑자기 돌덩이가 흔들리자, 일제히 하늘로 날아올랐다.


‘치지지직!’


잠시 진동하던 돌덩이는,

측면에 용접 자국 같은 불빛이 위에서 아래로 쭈르륵 생기더니, 이내 양쪽으로 ‘쩌쩍’ 갈라졌다.

갈라진 틈 사이, 검은 포털에서 뭉치와 리가 차례대로 걸어 나왔다.


“길이 좁아븐디, 균형 감각이 솔찬하구마.”

“뭐, 이 정도야.”


뭉치의 칭찬에 어깨를 으쓱거리는 리.


“하여간, 요새 젊은것들은 겸손이란 걸 모른당께. 쯧쯧쯧”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 드는 뭉치.

손거울 크기의 금색 조각이었다.

뭉치가 조각을 치켜들고 살짝살짝 좌우로 기울이자, 햇빛이 조각 면에 반사되며 금빛 분진이 뿜어져 나왔다.


“신기허지? 또 안 신기하다고 혀라.”


열심히 조각을 좌우로 기울이며 주변을 둘러보는 뭉치.

그때 언덕 아래쪽 커다란 나무 뒤에서 사람 형체 하나가 ‘스윽’ 모습을 드러냈다.


몸통부터 잎사귀까지 새하얗게 빛나는 나무 곁에서, 그도 조각 같은 걸 치켜들더니 살짝살짝 움직였다.

뭉치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조각에서도 금빛 분진이 뿜어져 나왔다.


“오케, 왔구만.”

“누구? 희망자인가?”

“왐마, 그 겁쟁이들이 여그까지 올 리가 있간디. 천계 쪽 브로커랑게.”


조각을 작업복 안 주머니에 집어넣는 뭉치.


“환생 관리자를 직접 봐야 안심헌 게, 지 있는 명천계, 것도 안전한 지 집서 만나자는 놈인디, 여까지 나올 리가 있간디? 여그서 얼쩡거리단 천계병한티 체포되기 십상이여.”

“천계병? 체포?”


브로커를 향해 터덜터덜 걸어 내려가는 두 사람.

브로커도 두 사람을 향해 천천히 걸어 올라왔다.

브로커의 머리 뒤로 연한 하늘색의 원형 고리가 보였다.


“쩌그, 쩌 아래, 갈대밭 같은 거 보이쟤? 쩌게 다 ‘영귀풀’이여. 그라고 하늘서 떨어지는 눈 같은 거 보이쟤? 쩌것은 명천계를 이루는 에테르 입잔디, 영귀수가 쩌걸 빨아들여 부러. 쩌것들을 잘라다 ‘환’ 형태로 만들믄 그것이 ‘천계환’이 되는겨.”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보는 리.

비단 모양의 구름이 한 번씩 출렁일 때마다, 구름 끝이 부서지며 눈꽃 같이 미세한 조각들이 하늘에 흩뿌려졌다.


손을 펼쳐 조각을 받아 드는 리.

눈 결정 같은 게 손바닥 위로 떨어졌다.

손가락으로 찍어 먹어보니 살짝 단맛이 났다.


“천계환은 사실 천계군의 무기여. 그걸 먹고 에테르를 순간적을 높여불쟤. 환각작용도 쪼까 있응게, 더 전투적으로 싸워불 수도 있고. 그래, 영귀풀 군락지는 대부분 천계병들이 관리하는 겨.”


순간, 오발탄과의 싸움 중, 그가 흰 구슬 같은 걸 먹고 에테르를 훅 끌어올리던 모습이 눈앞을 스쳤다.


“아... 그게 천계환...”

“아마 쩌그 어디서도 천계병들이 틀림없이 감시하고 있을껴. 암튼 괜히 눈에 띄지 말고 후딱 가자고.”


언덕을 내려가며 영귀풀 밭을 천천히 둘러보는 리.

그러다 웃자란 영귀풀 사이로 검은 형체가 스르륵 움직이는 게 보였다.

뭔가 싶어 자세히 들여다보는데,

검은 형체는 마치 리의 존재를 눈치채기라도 한 듯,

미어캣처럼 몸을 곧추세우더니 뒤를 돌아다봤다.


순간 리와 눈이 마주치는 검은 형체.

하얀색 로브를 걸친 아이였다.

검은 머리를 허리까지 땋은 게, 여자아이 같았다.


초등학생쯤으로 보이는 아이는 어깨에 에코백 같은 가방을 메고 있었는데,

가방 밖으로 영귀풀 이파리들이 삐져나와 있었다.


“어, 저기!”


리가 풀밭을 가리키며 자리에 멈춰 섰다.

덩달아 멈추며 돌아보는 뭉치.


“잉, 서리꾼이 구마. 신경 꺼불드라고. 쩌런 서리꾼들이 있어야, 환생 여행이고 뭐고 할 수 있응게. 요새 ‘천계 살이’가 워낙 지랄 맞아서, 쩌런 놈들은 흔하당께. 덕분에 우리 같은 사람도 먹고살고.”

“천계병한테 잡히지 않나?”

“잡히거나 말거나, 내 알 바 아니고. 후딱 가자고.”


잠시 리 일행을 지켜보다 별 일 아니라는 듯, 다시 풀 사이로 몸을 숨기는 아이.

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그리곤 다시 브로커를 향해 걸음 떼려는데, 순간, 발에 끈적한 접착제라도 묻은 듯 발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어, 이게 왜?”


발을 보려 고개를 숙이는데, 이번엔 공기에 접착제라도 발라진 듯 몸도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움직이려 힘을 세게 주자, 공간이 더 강하게 리의 몸에 들러붙었다.


“어, 저기, 뭉치! 이게, 이게!”


앞서 걸어가던 뭉치가 돌아서 리를 바라봤다.

리를 둘러싼 공간이 아지랑이 일듯 일렁거리고 있었다.


“이런 니미럴, ‘천계의 저항’이여! 야야, 빨리!”


브로커에게 고함을 지르더니, 리를 향해 냅다 뛰어가는 뭉치.

얼른 리에게 손을 뻗었다.


“잡아!”


힘겹게 손을 뻗어 뭉치의 손을 맞잡는 리.

두 손으로 리의 손을 잡은 뭉치는, 발 뒤꿈치를 땅에 박은 채 줄다리기하듯 있는 힘껏 몸을 뒤로 기울였다.

리의 몸에 있던 아지랑이가 붙잡은 손을 타고 스멀스멀 뭉치 쪽으로 번져갔다.


“그랑게 내 후딱후딱 가자고 안 하드냐! 늑장을 다 부려갔고 이 지랄이랴. 야야! 뭐더냐!”


있는 힘껏 고함을 지르는 뭉치.

공간이 점점 더 강하게 옥죄어 시야까지 가려오자, 안 되겠다 싶었던 리는 에테르를 끌어올리려 정신을 집중했다.

리의 눈빛이 천천히 연한 초록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안돼! 눈치챈다고! 오발탄과 마주치기 전까진 힘을 드러내면 안 돼!”


스카프에서 비토가 고개를 쑥 내밀더니 리에게 소리쳤다.


“으으으, 젠장!”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이를 깨물며 견디는 리.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는데, 백지라도 된 듯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갑자기 뭔가가 ‘훌렁’ 리의 몸에 씌어졌다.

곁눈질로 보니 두툼한 로브였다.

광채가 날 정도로 새하얀 로브였다.

브로커는 얼른 돌아가 뭉치에게도 로브를 입혔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들러붙던 공간이 천천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몸을 옥죄던 압박도 약해지고, 팔다리도 조금씩 움직여지기 시작했다.


잠시 뒤 이내 천계의 저항이 완전히 사라지자, 리와 뭉치는 맞잡은 손을 풀고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휴우우’ 긴 한숨을 내쉬는 두 사람.


“천계의 저항이 이렇게 빨리 일어나는 건 또 처음 보네요. 오발탄은 어디 가고, 이 친구는 뭐죠?”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하는 브로커.


“휴우, 딱 보믄 모르냐. 대타 아니여. 아이고 죽겄네.”


브로커가 리의 위아래를 훑어봤다.

어느새 리와 뭉치의 뒤통수 뒤로도 연한 하늘색의 원형 고리가 나타났다.


“그 빠꼼이가 대타를 보냈다고요? 그럴 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목을 좌우로 꺾으며 ‘두둑’ 소리를 내는 뭉치.


“뭐, 그라고 됐어. 그냥 미팅잉게, 별 상관없자녀?”


뭉치가 손을 맞잡아 리를 일으켜 세웠다.

키 차이 때문에 리가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여전히 미심쩍은 눈으로 리를 바라보는 브로커.


“오케, 노 프라블럼. 저야 길 안내만 해주면 끝이니까요. 로브의 효과가 그리 길진 않으니 빨리빨리 움직이죠. 다시 천계의 저항이 시작되면 그땐 흡수되는 걸 피할 수 없어요.”

“또, 또, 재수 없는 소리, 쩌노무 주둥아리를 확...”


잰걸음으로 언덕을 걸어 내려가기 시작하는 세 사람.

‘샤아앙’ 바람이 불며 하늘에 또다시 에테르 조각들이 흩날렸다.


“희망자 거처는 어디랴?”

“빛의 대성당, 오벨리스크 뒤쪽.”

“에, 거그는 ‘나미아의 승전비’ 아래 같은디.”

“근처죠.”

“염병할, 시내를 관통해야 하자녀. 천계병들이 곳곳에 있을텐디.”


뭉치에게 다가와 로브의 모자 씌우는 브로커.

팔을 뻗어 리도 모자를 씌웠다.


“이거나 잘 쓰세요. 그럼 걸릴 일 없을 테니까.”


브로커가 팔꿈치로 리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어색하게 이빨을 보이며 웃는 리.


언제 빠져나왔는지 비토가 리의 머리 뒤에 생긴 원형 고리를, 마치 놀이기구처럼 들락날락하며 돌았다.


*


“천계요? 리 혼자? 불법으로?”


환생 관리국 정문길을 걸어 내려오던 유니가, 일권을 바라보며 눈을 부라렸다.

유니의 기세에 눌려, 방어 자세를 취한 채 고개를 끄덕거리는 일권.

그 모습에 어이없다는 듯, 유니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진짜 대책 없는 사람들이구만. 리 혼자서 뭘 어쩌겠다고. 천계병에게 붙잡히기라도 하는 날엔...”

“혼자는 아니쟤. 스모커가 있응게.”

“아, 선배!”


유니가 주먹을 치켜들자, 일권이 얼른 서너 걸음 앞으로 걸어 나가 몸을 피했다.

일권의 뒤로 ‘심판국’으로 향하는 영혼들의 행렬이 보였다.


“하아, 진짜. 그럼 우리가 한가롭게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요. 협조를 받든, 다른 스모커를 찾든 빨리 도울 방법을 찾아야죠!”

“그랑께 지금 나가 심판국으로 가는 거 아니요. ‘긴급 천계 출장’ 협조받으러. 자네는 참말로 승질이 급해. 말도 끝까지 다 안 들어불고.”


일권이 안 주머니에서 파피루스를 살짝 꺼내 들어 보였다가, 다시 넣으며 투덜거렸다.


“공문 제출한다고 다 승인되는 것도 아니고. 징계 예고까지 떨어진 우리 팀에, 출장 허락이 참 잘도 나겠어요. 에휴,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어야지.”

“과장님이 시방 심판국에 있응게, 내 과장님 하고 잘 이야기해 볼라요. 자네는 그만 흥분하고 ‘암형문 보수’ 현장 답사나 잘 마치고 오소.”

“에이, 그놈의 ‘대 환생일’, ‘대 환생일’, ‘대 환생일’!”


땅바닥을 발로 ‘쿵, 쿵’ 구르며 짜증을 부리는 유니.

불똥이 튈세라 일권이 얼른 심판국 길로 접어들었다.


몇 걸음 가다 돌아서 유니의 눈치를 살피는데,

순간 영혼들의 행렬 뒤쪽에서 불쑥 그림자가 튀어나왔다가, 휙 몸을 숨기는 게 보였다.


“아따, 저 노무 원숭이 시키는 디지지도 않아야. 하여간에, 일 다 마치고 이따가 다시 야그 하더라고. 나 먼저 가네!”


영혼들을 요리조리 피하며 심판국을 향해 뛰는 일권.

그의 뒤를 어린 오랑우탄 한 마리가 빠르게 뒤쫓아 갔다.


그 모습을 모며, 또다시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유니. 손에 든 서류철을 보더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


“궁금한 게 있는데.”


천계 언덕을 터덜터덜 내려오다 리가 입을 열었다.


“천계에 천계병이 왜 필요하지? 천계는 영혼들이 평화로이 안식하는 곳 아닌가? 그런 곳에 군대가 있을 필요가 있나?”


그 이야기를 듣더니 브로커가 뭉치를 보며 피식 웃었다.


“순진한 거예요, 순진한 척하는 거예요?”

“세상 물정 모르는 게지. 보쑈, 환생 관리자 양반. 인간들이 모이는 곳은 어디든 다 똑같당께. 환생계든, 명천계든, 암형계든. 자원은 딱 정해졌는디, 욕심은 죄다 끝이 없쟤. 그라니 싸움이 벌어지는 거여, 하나라도 더 갖겄다고. ‘무력’이 없음, 그걸 말릴 수가 읎당께.”

“백날 말로 설명해 봐야 뭐합니까. 한번 눈으로 봐야 빡하고 감이 오죠.”


브로커가 주먹으로 자기 머리를 툭 치더니, 언덕 한쪽, 높은 바위에 훌쩍 뛰어올랐다.

리도 얼른 그를 따라 바위 위에 올라섰다.

그러자 언덕 아래로 천계의 드넓은 도심이 한눈에 들어왔다.


“자, 직접 보세요. 웰컴 투 더 헤븐!”


끝없이 펼쳐진 도시의 위용에 자기도 모르게 입이 떡 벌어지는 리.


도시의 하늘을 뒤덮은 비단 구름이, 리를 환영하기라도 하듯 부드럽게 너울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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