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다섯을 쓰다듬어
3월은 아직 춥다. 봄은 언제 오는 건지, 봄 햇살은 얼마나 따뜻했던 건지. 봄맛이 기억나지 않는다. 교실은 아직 검은 패딩이 점령하고 있다. 봄은 한참 멀리 있는 것 같지만, 어쨌거나 3월이 되면 봄맞이 꽃단장을 시작한다. 교무실을 둘러보며 명당을 찾는다. 앉은 자리에서 멀지 않으면서 다른 선생님들의 동선에 방해가 되지 않는 곳, 인테리어를 크게 파괴하지 않는 곳을 탐색한다. 그곳에 내 소중한 카트를 주차한다.
마트용 접이식 카트 안에는 제목도 시가 되는 시집들이 들어있다. 50권 넘는 시집들이 각기 다른 제목을 달고, 각자의 컬러를 입고 차곡히 쌓여있다. 일 년 동안 함께할 우리 살림살이다. 3월이 되었으니 정성스럽게 시집을 고른다. 아이들과 한 해 동안 밥처럼 지어먹을 시들을 고르는 일이다. 일주일에 한 번 털털털 카트를 끌고 교실로 들어선다. 트럭 만물상처럼 "골라 골라" 마음에 드는 시집을 골라. 아이들은 일 년 동안 꼭꼭 씹어 먹을 시집을 골라잡는다.
수업을 공개하는 날, 아이들과 반년 넘게 읽고 또 읽은 시집을 활용하여 수업을 하기로 한다. 주제는 ‘시 처방하기’다. 현재 자신의 고민을 솔직하게 적는다. 아이들은 의사 선생님이 되어 친구의 고민을 읽고 진단한다. 반년 넘게 꼭꼭 씹은 시집에서 친구에게 처방할 시를 고른다. 어떤 시를 골라야 할지 모르겠다면 전교생이 함께 만든 추천 시 목록을 살핀다. 처방할 시를 골랐다면 친구의 고민 글에 시구절과 함께 위로와 격려의 댓글을 달아 준다.
이 수업에서 적절한 시를 고르고 처방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솔직한 고민을 적는 것이다. 열다섯 소년들에게 진지하게 묻는다. 너희들의 고민은 무엇이냐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냐고, 지금 떠오르는 그것을 적어보자고. 고민은 대체로 비밀스러운 것들이 많기에 익명으로 적도록 한다. ‘고민이 없는 게 고민이에요’ ‘세상에 예쁜 여자가 너무 많아서 고민이에요’부터 ‘친구 관계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요’ ‘하고 싶은 일도 없고, 좋아하는 일도 없어요’ ‘불면증으로 괴로워요’까지 다양한 고민이 올라온다.
공개 수업이더라도 최대한 평소와 같은 분위기를 만들려고 하지만, 낯선 분(?)들께서 뒤에 계시니, 공기의 흐름이 조금 다르다. 평소와 다른 긴장감이 돈다. 그런데 소년 K가 오늘 좀 이상하다. 창가 맨 뒤쪽에서 의자를 뒤로 쭉- 빼고 흔들고 있다. 수업에 적극적이지는 않더라도 방해는 하지 않는 녀석인데 낯선 분들이 자기 바로 뒤에 있어서인지 약간 흥분되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신나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수업 진행 방법에 대해서 설명한 후 “자, 여러분 모두 알겠죠~?”라고 묻자, 소년 K가 “뭔 말인지 모르겠어요~”라고 대답한다. 교실은 웃음바다가 되었고, 장학사님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K를 향한다.
활동이 끝나고 발표를 해보기로 한다. 친구의 고민을 읽고, 자신이 처방한 시를 낭송한다. 위로와 격려의 말도 전한다. 소년 J가 씩씩하게 손을 번쩍 든다. 교실 앞으로 나와 친구의 고민을 읽는다.
운동에 대한 고민입니다. 전에는 슬럼프가 왔었고, 대회를 잘 뛰려고 노력하는데 결과는 항상 지기만 합니다. 공부는 싫고, 운동은 좋고 하고 싶은데 대회 결과는 항상 노력하는데 지고 못합니다. 어떡해야 할까요?
J는 권대웅의 시 「햇빛이 말을 걸다」를 처방했다.
길을 걷는데
햇빛이 이마를 툭 건드린다
봄이야
그 말을 하나 하려고
수백 광년을 달려온 빛 하나가
내 이마를 건드리며 떨어진 것이다
나무 한 잎 피우려고
잠든 꽃잎의 눈꺼풀 깨우려고
지상에 내려오는 햇빛들
나에게 사명을 다하며 떨어진 햇빛을 보다가
문득 나는 이 세상의 모든 햇빛이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강물에게 나뭇잎에게 세상의 모든 플랑크톤들에게
말을 걸며 내려온다는 것을 알았다
반짝이며 날아가는 물방울들
초록으로 빨강으로 답하는 풀잎들 꽃들
눈부심으로 가득 차 서로 통하고 있었다
봄이야
라고 말하며 떨어지는 햇빛에 귀를 기울이며
그의 소리를 듣고 푸른 귀 하나가
땅속에서 솟아오르고 있었다
J는 천천히 또박또박 시를 낭송한다. ‘땅속에서 솟아오르고 있었다’라는 마지막 구절을 댓글로 달았다.
이 시구절처럼 슬럼프가 지나고, 때가 되면 작은 싹처럼 올라와 점점 커져갈 거야. 그 과정이 험난하고 힘들더라도 힘내!
라고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도 전했다.
갑자기 교실이 웅성웅성한다. 모두의 시선이 K를 향하고 있다. 열다섯 소년 K가 눈이 시뻘게져서 울고 있다. 아까부터 주의를 끌더니,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당황했다. 등줄기에선 이미 땀이 솟구친다. K의 상황을 살피다 이내 알게 되었다. 방금 읽은 고민의 주인공은 K였다. K는 태권도 선수를 꿈꾸는 태권소년이다. 대회에 나가느라 수업에 참여하지 못할 때가 종종 있다. 최근 출전했던 대회마다 만족할 만한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그래도 늘 씩씩하고 밝아서 마음속 부담감의 무게를 헤아릴 수 없었다. 열다섯 소년의 한 번 터진 울음은 쉽게 그치지 않는다. 친구들이 K의 어깨를 토닥인다.
얼마 전 K가 운동장 옆 계단에서 혼자 앉아 있었던 것이 생각났다. K는 위로가 필요했고, ‘힘내!’라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필요했다.
너는 지금 땅속에서 솟아오를 준비를 하는 중이야, 봄은 수백 광년 동안, 아주 아주 오랜 시간 달려온 빛 하나 덕분에 찾아온단다. 지금 많이 힘들지? 그래도 봄은 반드시 올 거야. 그러니 지금은 어둠을 달리자.
라고 시가, 햇빛이 소년 K에게 말을 걸었다.
친구 J의 진심 어린 처방전이 얼어있던 마음을 녹였다. 땅속에서 솟아오를 준비를 하며 꿈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