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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쌀알 권지연 Oct 22. 2022

빨간 다이어리를 보며 너를 생각해 –깨비 책방

열다섯을 쓰다듬어

 열일곱의 치부(恥部)책 1998 빨간 다이어리 안에서 반가운 물건이 튀어나왔다. 학창 시절 내 분신과도 같았던 그것. 도시락 가방만큼, 용돈만큼이나 중했던 그것은 바로 깨비 카드다. 중학교 때였나, 우리 동네에 깨비 책방이 생겼다. 도서대여점인 깨비 책방은 명륜*사갈비나 C*편의점처럼 어느 동네에나 있었다. 깨비 책방 전용 멤버십 카드가 깨비 카드이다. 그 시절 나도 멤버십 카드 들고 다니는 여자였다는 것이다.     


 지금부터는 깨비 카드를 발견하고 깨달은 바를 적어보려고 한다.     


 깨비 책방은 영혼의 안식처였다. 용돈의 80% 이상을 깨비에 쏟아부었다. 한 권 대여비가 300원 정도였는데, 하루에 서너 권씩, 주말엔 왕창 빌리자면 자금이 꽤 필요했다. 자금 조달을 위해 용돈을 허투루 쓰지 않았다. 방문 걸어 잠그고 포카칩 먹으며 만화책 쌓아두고 볼 때면,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하교 후 날마다 깨비 책방으로 출근 도장을 찍었다.     

아저씨 신간 나왔어요?     

 책방 문을 열자마자 여쭙는다. 신간이 나와야 책을 빌릴 수 있다는 것은 그 책방에 더 이상 읽을 책이 없다는 뜻이다. 순정 만화는 기본, 학생 수준에서 읽을 만한 만화는 거의 빌려본 것 같다.      


 열네 살 때, 만화책에 발을 들였다. 처음으로 만화책 한 권을 통으로 읽고는 개벽, 하늘이 열리는 것 같았다. TV 만화와 비교할 수 없는 스토리와 깊이에 탄복했다. 첫 만화 제목이 ‘가을 머시기...’였는데, 그 ‘가을 머시기..’를 읽고는 너무 슬퍼서 심장이 아팠다.      


 풀하우스, 슬램덩크, 오렌지 보이, 오디션, 언플러그드 보이, 인어공주를 위하여, 원피스.. 속에 나오는 주옥같은 대사와 절절한 사랑, 휴머니즘, 고진감래, 인과응보는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긍정적인 눈으로 바라보게 했다. 살아보니 세상은 만화처럼 돌아가진 않았지만, 내게 남아 있는 일말의 순수함은 학창 시절의 만화가 심어준 것이라 생각한다. 국어로 선생 노릇을 하고 있는 것도 그때 읽은 만화의 영향인 것 같..?     


 학교에서는 만화로 하나가 된 패밀리가 있었다. 서로 빌려주고 읽고 그러다가 선생님께 걸리면 만화책을 압수당하거나 혼쭐이 났다. “만화책이 뭐냐, 좋은 책이 얼마나 많은데”라고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씀하셨다. 사실 그땐 이해받길 기대하지 않았다. 그토록 재밌는 걸 멈출 수 없었다. 염려는 감사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1998년 다이어리 속 깨비 카드를 보는 순간. 선생인 나를 이해시키고자 애썼던 그때 그 소년들이 떠오른 것이다.     


 중간고사 첫째 날이었다. 시험 기간에는 일찍 마치니, 동료들과 근처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고 오기로 했다. 오랜만에 여유 있게 소박한 담소를 나누고 있는데, 창밖으로 낯익은 자들이 보인다. 우리 반 소년들이다. 오늘 시험을 잘 쳤는지 기분이 좋아 보인다. 신나게 근처 건물로 들어가길래 자세히 보니, 간판에 PC방이라고 쓰여 있다. 시험기간에 PC방? 반사적으로 몸뚱이가 식당 밖으로 나가 외친다. “야 이 자들아!! 게 섰거라!”     


 다음날 PC방 소년들이 애써 시선을 피한다. “시험이 아직 이틀이나 남았는데 PC방? PC방에 인생을 올인할 참이냐! 너희가 정녕 학생이란 말이냐, 니 죄를 니가 알렷다.” 따뜻한 조언을 하고 나니 소년 S가 말한다. “선생님 저희랑 PC방 한 번만 같이 가요.”     


 S는 선생님이 PC방에 같이 가주면 라면을 쏘겠다고도 했다. 게임을 해 본 적이 없다고 하니 가르쳐 주겠다고도 한다. 굳이 그래야 하냐고 하니 한 번 해보시면 안다고 한다. 함께 있던 소년들이 갑자기 힘을 얻어서 게임을 추천하기 시작한다. 자신들의 유일한 낙을 열과 성을 다해 침 튀기며 설명하는데, 속으로 저자들이 어제 국어 시험은 제대로 쳤을까.. 를 생각했다.     


 열다섯 소녀였던 시절에 PC방이 있었더라면 나는 PC방에 다녔을까? 깨비 책방 드나들 듯 출근 도장을 찍고 있었을까. 만화 책방과 PC방은 무엇이 다를까. 아.. 자신이 없어진다. 분명 PC방은 저들 영혼의 안식처다. 질풍노도 속에서 대혼란을 겪으며 성적과 잔소리로부터 받는 스트레스를 모니터 앞에서 키보드 두드리며 분출하고 있다. 깨비 카드를 보는 순간 갑자기 소년들의 심정이 완벽하게 이해되어 버렸다. 이런 걸 돈오(頓悟)라고 하나. 이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 공감이 된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 정신을 차리고 저들과 나의 차이점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적어도 나는.. 나는 적어도.. 시험 기간 마지막 날에만 깨비 책방에 갔다! 내일이 시험인데 만화책을 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일 년에 꼴랑 4번 있는 중간, 기말고사 기간에는 벼락치기든 뭐든 혼신의 힘을 다했다. 적어도 학생으로서의 예의는 지켰다는 것이다. 휴.     


 소년들이여, 우리 학생으로서 그 정도의 예의는 지킵시다.
워라밸 들어봤죠? 어른들도 일과 삶의 균형을 찾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스라밸 어때요? Study-life balance 방금 지어낸 말인데 괜찮네요. 뭐든 자신을 망치는 것은 위험해요. 지금부터 적절한 균형을 찾아가는 것을 연습해 보도록 하죠. 게임을 하더라도 살살하란 말입니다. 살살..     


 깨비 책방을 내 집처럼 드나들던 시절, 우리 집 코앞에 새 책방이 생겼다. 가까운 곳으로 근거지를 옮기고 역시 그곳에서도 출근 도장을 찍었더랬다. 20대 후반의 어느 날, 그 책방이 생각났다. 불현듯 그리워져 찾아가 봤다. 예전 주인 총각이 늙지도 않고 앉아 있어서 너무 놀랐다. 나를 기억하진 못하시는 것 같았다. 만화책을 몇 권 뽑아 들고 카운터로 가서 회원번호를 말하려던 그때. “탁 탁” 주인 총각이 정확히 내 회원번호 36을 입력하였다. 소름이 돋았다.. 뻔질나게 드나들긴 했나 보다.     


 이래나 저래나 나는 소년들에게 할 말 없는 선생이다.


열일곱의 치부책 1998년 빨간 다이어리 속에서 튀어나온 깨비 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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