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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쌀알 권지연 Oct 19. 2022

빨간 다이어리를 보며 너를 생각해 –논다는 건

열다섯을 쓰다듬어

 아이가 초1이 되면서 육아휴직을 했다. 등하교라도 같이 해주자는 마음으로 1년 휴직을 던졌다. 아이 손을 잡고 룰루랄라 등교를 하는 게 신난다. 아침 등굣길 풍경이 낯설고 설렌다. 그런데 2주 정도 지났을 무렵 “엄마 나 혼자 학교 갈래.”라며 엄마는 따라오지 말라고 한다. 난 더 따라가고 싶은데, 독립심이 과하다. 누굴 닮은 거지. 결국 몰래 몇 번 더 따라갔다가 걸리고 난 후, 할 일이 없어졌다. 난 왜 휴직을 한 걸까. 대출금도 값아야 하는데.    

 

 본의 아니게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평소 눈에 띄지 않았던 것들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먼지가 쌓인 책을 들춰보기도 하고, 잡동사니들을 정리하기도 한다. 그러다 구석진 곳에서 상자 하나를 꺼내 들었다. 오래된 보물 상자다. 중고딩 때 찍은 스티커 사진, 이미지 사진, 유행가요가 담긴 카세트테이프 등등. 그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녀석이 있다. 두툼하고 빵빵한 모습으로 여고시절의 추억을 한가득 담고 있는 빨간 다이어리다.     


 어지간해선 읽지 않는 치부(恥部)책 같은 것이기도 하지만, 약간의 허세와 함께 유치 찬란하고 순수했던 여고시절의 일상과 고민이 담긴 도저히 버리려야 버릴 수 없는 골동품이다. 풋풋, 풋내 나는 열일곱 시절의 가감 없는 기록이기도 하다. 다이어리 단추를 연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다. 이제부터는 나 자신과의 싸움이다. 저 유치 찬란한 깨알 같은 글자들을 읽을 것인가 말 것인가.     


 열일곱의 나는 바빠도 너무 바쁘다. 1년 열두 달 하루도 그냥 지나간 날이 없다. 뭔 일이 그렇게 많은지 피곤해서 어찌 살았나 싶다. 두어 장 읽다가 덮는다. 얼굴이 화끈거린다. 마음을 다잡고 다시 읽기 시작한다. 일단 오빠들 이야기가 많다. 그 시절 우리가 쫓아다녔던 앞 집, 뒷 집 오빠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      


 그리고 체육대회, 소풍, 수학여행 등 노는 것에 진심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체육대회 때는 반짝이 붐비나를 흔들며 치어리더를 했다. 디바의 ‘왜 불러’ 춤을 미친 듯이 연습했다. 수학여행 장기자랑에서는 당시 인기 있는 보이그룹의 노래에 맞춰 춤을 췄다. 역시나 미친 듯이 연습했다. 고2 야영 장기자랑에서는 파란 나팔바지를 입고 엘비스 프레슬리 춤을 췄다. 얼굴에 시꺼먼 구레나룻도 그렸다. 그땐 그냥 미쳤었다.     


 교사가 되니 매년 체육대회, 소풍, 야영, 수학여행, 축제가 열린다. 그때마다 반 아이들에게 말한다. 


최선을 다해 노는 것도 공부입니다.
공부할 땐 열공하시고, 놀 땐 미친 듯이 놀아야 합니다. 

 살아보니 논다는 건 매우 중요하다는 걸 알겠다. 잘 노는 건 삶의 질을 향상시킨다. 놀아봐야 내가 무얼 좋아하는지 알게 된다. 학교 행사에 뜨뜻미지근하던 소녀 소년들의 마음에 슬그머니 불씨를 지핀다.      


 소년 H와 J가 찾아왔다. 반장과 부반장이다. 올해는 코로나19로 축제 장기자랑을 영상으로 만든다기에 솔직히 흥이 좀 덜 났다. 반 아이들에게 어디 한 번 알아서 해 보거라 했더니 뭔가를 찍어왔다. 소년들이 생각보다 열심히 했다. 어떤 소년은 혼자 춤을 추고, 어떤 소년들은 나름 분장을 하고 그룹으로 춤을 췄다. 열심히는 했으나 음, 뭐랄까. 한 방이 없달까. 그런 느낌이었다. 쇼!음악중심이나 뮤직뱅크처럼 음악 방송 컨셉으로 영상을 엮으면 좋을 것 같았다. 그러려면 MC가 필요하다. 음악 방송에는 대부분 여성과 남성이 함께 MC를 맡는다. 우리 학교는 남자 중학교다. 반장 H에게 말했다. “자고로 축제의 꽃은 여장이지. 여성 MC가 필요하다. 넌 여장을 하도록 하여라.”    

 

 여장 반장 H와 부반장 J의 MC영상이 추가되면서 영상의 퀄리티가 매우 고급스러워졌다. 흡족했다. 소년 H의 희생정신으로 축제 영상 콘테스트에서 1위를 하게 되었다. H와 J는 부둥켜안았고, 반 아이들은 환호했다.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이 전 학교에서는 소년 K가 엘사 분장을 하고 렛잇고에 맞춰 퍼포먼스를 하기로 했다. 내성적인 소년 K가 엘사를 맡게 되어 더욱 흥미진진했다. 그런데 K가 조건을 내걸었다. 단, 담임샘이 올라프 역할을 해줄 것. 축제 날 소년 K와 나는 각각 엘사와 올라프 분장을 하고 무대에 올라 압도적 퍼포먼스를 펼쳤다. 같이 하얗게 불태웠다.      


 상대적으로 소녀들은 소년들보다 불씨가 더 빨리 확산된다. 불씨를 던지기만 해도 활활 타오른다. 소녀들이 춤 연습으로 한창이다. 무대에 오르더니 무아지경의 댄스를 보여준다. 열광의 도가니였다. 은상을 수상하고 부상으로 상품권을 받았는데, 그것으로 내게 막창과 닭발을 쏘겠다고 한다. 그날 열다섯 소녀들과 막창집에서 만났다.(김영란법 시행 전)     

 

 막창집에서의 폭풍 수다를 잊지 못한다. 여중생의 탈을 쓴 아저씨들 같았다. 땀 흘려 고생한 뒤에 얻은 막창과 닭발을 씹으며 행복해하던 소녀들의 모습이 선하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 놀고 나서도 보람을 느낄 수 있다. 소리 지르고, 환호하고, 웃고, 흔들며 모든 에너지를 쏟아 냈을 때의 쾌감을 경험한다. 혼자가 아니라 친구들과 같이 성취해낸 보람이다. 놀고 나서 마음이 튼튼해진다. 힘이 생긴다. 지성, 감성, 의지를 발휘하여 어디서든 내 쪼대로 잘 노는 인간이 전인적 인간이다.        


 학창 시절을 떠올릴 때면, 코피 터지며 공부한 기억보다 눈물 나게 웃겼던 일들, 미친 척 나대고 놀았던 일들, 친구들과 무모하게 작당하고 모의한 일들이 먼저 떠오른다. 어른이 되면 눈치 보고, 지켜야 할 게 많아진다. 할 수 없는 건 아니지만 작당할 친구들이 줄어든다. 학교에서는 공식적으로 나댈 수 있다. 소녀 소년들에게 주어진 특권이다.     


 누리는 자가 위너다. 마음껏 누린 소녀 소년들이여, 잘했다. 신나게 놀았으니 다음은 기말고사다. 자, 떠나세 열공의 세계로.    


  

열일곱의 치부(恥部)책. 1998년의 빨간 다이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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