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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쌀알 권지연 Sep 28. 2022

가을밤 깊어질 때 너를 생각해

열다섯을 쓰다듬어

 자꾸만 밖으로 나가고 싶은 계절이다. 건물 안에 있는 것이 낭비인 것 같은 시절이 왔다. 아깝다. 지금 나가지 않으면 저 청명한 하늘과 흘러가는 구름을 놓친다. 선선한 바람은 지나갈 뿐 멈추지 않는다.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틈만 나면 나가야 하는 계절이 흐르고 있다. 낙엽이 떨어지는 속도를 생각한다. 낙엽이 떨어지는 속도는 가을이 지나쳐가는 속도일까. 가을은 짧아서 야속하고 못내 아쉽다. 스치듯 지나가는 귀한 시절이기에 틈틈이 밖으로 밖으로 나서야 하지만, 낮 동안의 현실은 건물 안을 탈출하지 못해 발만 동동 구른다. 시선은 자꾸 창밖을 향하고, 마음 못 잡은 엉덩이만 들썩인다.     


 그러니 낮의 의무를 무사히 수행하고 난 후, 밤이 되면 슬그머니 현관을 나선다. 역시나 낮 동안 엉덩이 들썩이던 다수의 동지들이 가을밤을 만끽하고 있다. 할 수 있을 만큼 코 평수를 넓혀서 가을 밤공기를 들이마신다. 가을이 잔뜩 묻은 가을밤의 산소가 콧구멍을 지나, 낮 동안 궁핍했던 폐를 가득 채운다. 가을이 한가득 찼다. 가을밤이 깊어간다.     


 소년 K는 유머감각이 뛰어나다. 날리는 멘트마다 빵빵 터진다. 모두를 웃기는 일이 그의 사명인 듯하다. 웬만해서는 당황하거나 흔들리지 않는다. 매사 능청스럽고 엉뚱하고 여유가 넘친다. 말하는 걸 들으면 열다섯인지 스물다섯인지 헷갈릴 때도 있는 반면, 반에서 야동을 한 번도 시청하지 않은 유일무이한 소년이었다. 덕분에 우리 반은 웃을 일이 많았다.      


 그런 K가 가출을 했다. 주말 저녁 K의 어머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K의 가출 소식을 전하셨다.

네? K가 가출을요?

 굳이 말하자면 K는 가출보다는 출가가 어울린다. 어머님과 다툼 중에 집을 나갔다고 전하시는데, 음성이 다급하게는 느껴지지 않는다. 처음 있는 일이라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걱정이 되신다고 하셨다. K와는 연락이 되셨냐고 묻자, K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다고 하셨다.  열다섯 소년 K가 야심 차게 감행한 가출의 최종 목적지는 할머니 댁이었다. 소년은 짐을 싸서 옆 동네 할머니 댁으로 가출한 것이다.     


 K가 비밀인 듯 비밀 아닌 곳을 안가(安家)로 삼고 특수 목적(?)을 이행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는 조금 안심했지만, 역시나 K의 가출 소식은 뜻밖이었다. K에게 전화를 했다. 풀 죽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 K에게 담임과의 비밀 접선을 제안했다. 다음날은 일요일이었다. K가 살고 있는 동네에는 영화관이 없다. K를 차에 태우고 영화관에 갔다. 무슨 영화였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2시간가량 영화를 보고 밥을 먹었다. 밥을 먹으며 영화 이야기를 한 것 같다. 학교 밖에서 본 K는 영락없는 열다섯 소년이었다.      


 K의 집까지는 여기서 차로 한 시간 정도 걸린다. 소년을 태워서 집으로 가는 길에 안동댐이 보였다. 잠깐 들러 벤치에 앉았다.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었다. 해질녘 강물은 조용하고 잔잔하다. K는 엄마와 싸웠다며 입을 뗐다. K는 평소 엄마를 많이 사랑하는 소년이다. 3월에 가정 방문을 갔을 때 모자 사이에 꿀이 뚝뚝 떨어지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툴툴대긴 해도 애정이 가득했다. 툴툴대는 건 열다섯 소녀 소년들에게 용인되는 전매특허 화법인 것을 안다.      


 무슨 일로 다투었냐고 물었다. 그날 엄마가 성적표를 확인하셨다고 했다. 성적이 자꾸만 떨어져서 엄마가 속상해하셨다. 하필 그때 K는 컴퓨터 앞에서 열정을 담아 게임을 하고 있었고, 그것을 목격하신 엄마의 분노가 폭발했다고 한다. 엄마가 다짜고짜 화를 낸다고 생각했고, 엄마가 너무 미웠다고 했다. 성적이 떨어져서 자기도 속상하다고 말했다. 대한민국에서 공부를 잘하건 못하건 아이들은 모두 공부 스트레스를 받는다. 공부를 잘하면 계속 잘해야 하니까 불안하고, 공부를 못하면 미래가 불안하고, 공부를 안 하면 해야 하니까 불안하다. 게임을 하면서도 불안하다.          


 아직도 엄마가 미우냐 물으니 아니라고 한다. 열다섯은 가끔 불같다. 화르륵 타올랐다가 이내 꺼진다. 상대방이 열을 올리면 맞불을 놓는다. 후퇴는 폼이 안 난다. 1분 뒤 후회하더라도 갈 때까지 가본다. K에게 할머님 댁으로 데려다주면 되겠냐고 하니, 집으로 가겠다고 한다. 가을이 깊어지고 있었다. 밤물결이 일렁이고 월영교의 불빛이 별빛인 듯싶었다. 가을이 잔뜩 묻은 바람이 선선하게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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