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에 불린 미역을 보며 너를 생각해
열다섯을 쓰다듬어
나는 요리를 못한다. 뭐든 10년만 버티면 전문가가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결혼 11년 차 현재 ‘만개의 레시피’와 같은 요리 어플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줄과도 같은 삶의 동반자다. 이상하리만치 레시피는 기억에 남지 않고 손에 붙지 않는다. 요리만큼은 미지의 세계처럼 느껴졌다. 내가 끓인 라면을 먹고 만족스러웠던 적이 없었다. 혼신의 힘을 다하면 다할수록 맛대가리라곤 없었다. 어린이들도 입맛에 맞춰 척척 끓여낸다는 그 라면을 말이다.
결혼 전까지 엄마의 따뜻한 밥 힘으로 살아가던 내게 주방은 친숙한 공간이 아니었다. 결혼식이 다가올수록 마음속에 원인 모를 찝찝함이 스멀스멀 올라왔었는데, 아마도 주방 공포증 때문이었던 것 같다. 상견례 자리에서 친정엄마는 “울 딸이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요리라든가...” 흘리듯 말씀하셨는데, 이 문장에서의 방점은 요리였다. 문장의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신 시부모님께서는 우리 집에 오실 때마다 늘 배달 음식을 시켜달라고 하신다.
끼니를 책임지는 자가 이런 상황이다 보니 나에게 의지하는 식솔들도 덩달아 요리책과 레시피 어플에 의지하는 신세가 되었다. 내, 식솔 굶기는 일은 없게 하리라 다짐하며 주방과 요리책과 레시피 어플을 벗하며 살아온 지 어언 11년. 내게도 만만히 여기는 요리가 생겼으니 그것은 바로 미역국이다. 비교적 손쉽게 맛과 영양을 책임져 주는 미역국을 나는 틈만 나면 끓여대고 있다. 생일이니까 미역국 먹어야지, 추우니까 미역국 끓여 먹자, 마트에 미역이 싱싱(?)해 보이네 미역국 끓여 먹어야겠다, 남편 요즘 뼈가 부실한 것 같군 미역국 끓여야지..
그런데 미역국을 끓이는 데에도 늘 막히는 지점이 있다. 미역국의 주인공인 미역의 양 조절은 대부분 실패다. 분명 세 식구 먹으려고 끓인 미역국인데 탱글탱글하게 거만해진 미역이 한 솥 그득이다. 그 과정은 이렇다. 마른미역을 꺼낸다. 지난번 미역국 끓이기에서의 깨달음을 상기시켜 미역을 소량만 식기에 넣는다. 너무 적은가 싶어 조금 더 넣는다. 바짝 말라비틀어진 미역이 초라하고 가소롭게 느껴져 좀 더 추가한다. 네 정녕 주린 나의 배를 채울 수 있단 말인가. 다시 한 줌 더 넣는다. 물을 넣고 10분 정도 딴짓을 하다가 확인한다. 산발한 미역과 조우한다.
미역국 끓이기에서 스키마 이론(선험 지식이 학습에 도움이 된다는)은 작동되지 않는다. 미역이 산발한 채 어색하게 웃고 있다. 미역의 잠재력에 새삼 놀란다. 너희들, 이런 존재였었지... 불현듯 어떤 소년들이 생각난다. 교실 속에서 소년들은 대단할 것도 화려할 것도 없다.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일상에서 의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영혼 없는 눈빛과 대답으로 자신은 지금 유체 이탈 중임을 암시한다. 소년들의 영혼은 미지의 시공간에서 부유하고 있는 게 확실하다. 그러다 가끔 ‘롤, 배그'라는 단어에 세포들이 급작스레 왕성해지며 동공과 입이 열리는데, 이때는 사람의 언어라기보다는 짐승의 포효에 가깝다. '롤, 배그'와 함께 ‘피방(pc방) 갈래’도 주로 쓰는 말이다. 이미 모든 에너지를 간밤에 피방이나 컴퓨터 앞에 쏟아부었기 때문에 대체로 책상과 한 몸이 되어 있다.
소년들도 처음에는 탱글탱글 윤기 좔좔 흐르고, 물기 가득 머금은 미역이었으리라. 다만 그들이 만난 세상은 물기 가득 머금은 자연산 미역으로 살아가기에는 조금 벅찬 곳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무도 그에게 수심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은 흰나비(김기림)처럼 지치고 시렸을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바짝 말려 살아가는 방법을 택했을지도 모른다. 소년 K의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다. 술주정을 못 견디신 어머니는 K를 두고 집을 나가셨다. 산골짜기를 돌고 돌아 나타나는 외딴집은 소년 S의 집이다. S는 할머니와 단 둘이 산다. 낮고 어두운 방에서 S가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소년 L 어머니의 국적은 베트남이다. L은 태어나 한 번도 어머니의 얼굴을 본 적이 없는데, 학기초 기초 조사서에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다고 적었다.
아무도 소년들에게 수심을 일러준 일이 없다. 어떤 마음으로 하루를 살아가고,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 내 지식과 경험으로는 삶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 소년들은 꿈이나 희망이라는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그런데 가끔, 아주 잠깐씩 그들의 미래에 대한 신호를 감지할 때가 있다. 수업 시간 중 소년들이 쓴 글로, 표정으로, 툭 내뱉은 말 한마디, 간혹 보이는 미소로 신호를 보낸다. 소년들은 아주 드물게 신호를 보내기 때문에 적당한 거리에서 무심한 듯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어야 한다. 욕쟁이 소년 J는 아무에게나 욕을 한다. 친구들의 호의와 선생님들의 관심에 욕으로 응대한다. J를 출근길 현관 앞에서 만났다. 교복 재킷 속주머니에서 사과를 꺼내더니, 내게 던지듯 주고는 달려갔다. 얼마나 만지작거렸는지 빨간 사과가 따뜻하고 반들반들하다. 따뜻하고 반들반들한 사과도 그 신호다. '썩 괜찮을 미래'에 대한 신호다.
잠시 웅크리고 있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지금은 터널 속이다. 보잘것없어 보이는 바짝 마른 미역이다. 미역은 바짝 말라가는 동안 줄에 매달린 채 바닷바람을 견딘다. 뜨거운 태양도 견딘다. 해풍과 태양을 견뎌낸 미역은 기계로 건조한 미역들과는 차원이 다른 맛과 영양을 가진다. 국물의 깊이가 다르니 인생의 깊이가 다르다. 소년들의 시간은 헛되지 않다. 언젠가 물속으로 풍덩 뛰어 들어가 탱글탱글 윤기 좔좔 흐르는 미역이 되리라는 걸 안다. 바짝 말린 초라한 미역 속에는 탱글탱글 윤기 좔좔의 잠재력이 담겨 있다는 것을 잘 안다. 부디 웅크린 채 말라가고 있는 시간 동안 덜 상처받고 조금만 아프길 바랄 뿐이다.
그러니까 준비 운동이 필요하다. 언젠가 풍덩 뛰어들 준비를 하며, 마음을 가다듬고 같이 심호흡을 해보는 거다. 조금 더 안전한 입수를 위해 스트레칭도 하고 가슴팍에 물도 좀 적시는 거다. 터널을 꼭 혼자서 건너라는 법은 없다. 어두컴컴한 터널을 누군가와 손잡고 통과하는 방법을 같이 고민해 보는 거다. ‘같이’라는 말이 아직 낯설고 어색하다면 일단 근처 도서관으로 가서 마음을 후벼 파는 제목의 책 한 권을 골라보는 거다. 그냥 그뿐이다.
웅크린 몸을 쫙 펴고, 다이빙하는 순간을 떠올리면 가슴이 벅차오른다. 소년들이 멋지게 다이빙하게 될 세상은 드넓고 푸르른 바다였음 좋겠다. 물 만난 미역은 탱글탱글 윤기 좔좔 흐르는 원래의 모습을 되찾게 되겠지. 푸르른 바다를 휘저으며 자유롭게 헤엄쳐 다닐 것이다. 한껏 산발이 된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