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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쌀알 권지연 Oct 07. 2022

봄바람 살랑일 때 너를 생각해

열다섯을 쓰다듬어

 열다섯은 한결같다. 변화무쌍한 감정의 소용돌이와는 별개로, 10년 전 그 녀석들도, 작년의 그 녀석들도, 올해의 이 녀석들도 한결같이 요구한다. “첫사랑 얘기해주세여-”     


 첫사랑 이야기를 17년째 하고 있다. 나의 첫사랑은 알고 있을까. 매년 본 적 없는 소녀 소년들의 주관심사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첫사랑아 미안하오. 선생님의 첫사랑은 평생 소환당하는 존재가 될 가능성이 크다. 첫사랑 시작할 때 고려해보아야 할 사항이다.     


 그러나 요구한다고 해서 절대 바로 풀지 않는다. 우리가 좀 더 가까워지고, 소중한 추억을 공유할 수 있을 정도의 사이가 되었을 때 풀겠다고 한다. 항의가 빗발치지만 굳게 버틴다. 첫사랑 정도나 되는 떡밥을 함부로 투척할 순 없다. 아끼고 아껴뒀다가 중요한 순간에 던져야 한다. 3, 4월의 긴장감이 풀리기 시작할 때, 잦은 공휴일과 행사로 느슨해지기 시작하는 5월의 어느 날이 적당하다. 5월의 봄, 첫사랑, 청춘. 삼박자 딱 맞아떨어지는 그때가 그때다.      


 첫사랑에 허우적거리는 청춘이 있다. 열다섯 소년 L은 첫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다. 어떤 날은 축 쳐져 있다가, 어떤 날은 신명이 나서 돌아다닌다. 감정이 널을 뛰는 것만 봐도 분명 짝사랑이다. 조와 울의 경계를 넘나들며 존재감을 드러낸다.      


 소년 L의 그녀는 같은 반 소녀 J이다. 소녀 J는 말과 행동이 사랑스럽다. 무슨 일이 주어지든 최선을 다한다. 특유의 긍정 에너지를 뿜뿜 날리는 소녀다. 소녀 J를 짝사랑하는 자가 L 뿐만은 아닐 텐데 걱정이다.      


 어느 날 소년 L로부터 문자가 왔다.

샘.. 저 사실 좋아하는 애가 있는데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이건 비밀이에요...

 

비밀이라고? 몹시도 허술하다. '너 빼고 다 알 것 같구나..'라고 말하려다 참는다. 짐짓 모른 체하며,

L에게도 봄이 왔구만!

 이라고 답한다.          

 

 그 후 종종 L로부터 문자가 왔다.

선생님, 오늘 J랑 이야기했어요!
아무래도 J가 저한테 관심 있는 것 같습니다!!
J의 마음을 모르겠어요. 저를 피하는 것 같아요.
J가 잘해 줬다가 못해 줬다가 그래요. 이상해요.ㅠㅠ


 아아 청춘(靑春)이로구나. 애달픈 청춘이 풋풋하다. L의 레이더는 온종일 J를 향해있다. 소녀의 행동 하나하나가 L에게는 분석의 대상이다. 별 것 아닌 행동도 우주를 뒤흔들 의미가 된다. J가 까르르 웃기라도 하면 온몸의 혈관이 자동 확장된다. 그래서 행복에 겹기도 한데, 처량하기도 하다. 생애 처음으로 느껴보는 감정의 소용돌이 앞에서 속수무책이다.      


 L이 정신 못 차리는 동안 성적도 같이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사랑에 빠지는 걸 누가 막으랴. ‘이 죽일 놈의 사랑이 문제지’가 아니다. 사랑은 죄가 없다. L에게 말했다.

L아.. J는 공부를 참 열심히 해. 그치..?
J는 어쩜 저렇게 매사 최선을 다할까. 기특하다. 그치..?
맞습니다. J는 귀여운데 공부도 잘합니다!     


 그 후 L이 공부란 걸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기초가 부족하니 처음엔 좀 골머리를 쓰는 것 같다. 공부 좀 하는 친구들한테 딱 붙어서 묻기도 하고, 책상에 앉아 수학 문제를 푼다. 심지어 소녀 J가 소년 L에게 공부를 가르쳐 준다. 흐뭇한 광경이구나. 이것이 바로 사랑의 순기능! 진정한 사랑의 힘이다!      


 결국 소년 L은 소녀 J와 사귀게 될 줄 알았으나 그러지 못했다. 소녀 J는 그 후로도 소년 L에게 공부를 열심히 가르쳐 주었고, 둘은 사제지간의 정을 나누는 묘한 관계가 된 듯하다.   


 참고로 내 첫사랑은 초1 때 짝꿍이다. 1989년 1학년 1반 교탁 앞에서 김흥국의 ‘호랑나비’ 춤을 추는 모습을 보고 한눈에 반했다. 1년 동안 친하게 지내다가 2학년이 되면서 다른 반이 되었는데, 복도에서 만나면 내가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부끄러워서 그랬다.


 섭섭했던 내 첫사랑이 집으로 전화를 걸어왔는데, 토요일 오후 목욕탕을 다녀온 후 엄마가 라면을 막 끓여 주셨을 때였다. “지연아 왜 나만 보면 피하는 거야?”라고 물었는데, 그땐 나도 그 이유를 몰라서 대답을 못했다. 수화기를 귀에 대고 한참을 서 있었다. 옆에서 엄마가 라면 불으니 어서 오라고 하셔서 전화를 끊었다. 그 후 일관성 있게 졸업할 때까지 5년 동안 그를 피해서 도망 다녔다. 5년 동안 같은 반이 되지 않았던 게 천만다행이다. 눈물 나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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