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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쌀알 권지연 Oct 13. 2022

선생님은 나를 기억하실까

쌀을 씻으면서도 너를 생각할 때가 있지


 학창 시절에 궁금하지만 물어보지 못했던 질문이 있다.

 선생님 저 아세요?   


 졸업 후 길거리에서 우연히 선생님과 마주치게 되었을 때, 50미터 전방에서 걸어오시는 저분은 분명 중학교 때 빛나리(죄송)선생님이 맞는데, 인사를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나를 기억하실까, 인사했는데 당황하시면 어쩌지. 같은 것을 고민하다가 살짝 방향을 틀어 걸어간 적이 있다.   

   

 세기말 라떼는 학창 시절 한 학년이 4-500명 정도 되었다. 담임 선생님이 아니고서야, 과목 선생님께서 내 이름을 모르시는 게 당연했다. 그래서 명찰을 꼭 달고 있었다. 고3 때 옆 반 친구가 조퇴를 해야 해서 담임 선생님을 뵈러 교무실에 갔다. 선생님께 조퇴해도 되냐고 여쭙자,

너희 담임 선생님한테 가봐봐봐봐...   


네?!? ... 졸업을 앞둔 학년 말이었다. 그 당시엔 한바탕 웃고 넘겼지만, 참으로 비통한 사건이다.


 그런데 의외의 상황에서 나를 기억하고 계시는 선생님을 만날 때도 있다. 도로 옆 인도를 걷고 있는데 빨간색 경차 한 대의 움직임이 수상하다. 멀리서부터 차선을 변경해가며 내게로 다가온다. 창문이 열리더니 “지연아 안녕~~” 하며 손을 흔드신다. 고3 때 담임 선생님이시다. 초임 시절 국어교사연수를 들으러 갔다가, 고등학교 때 별나게 좋아했던 국어 선생님을 만났다. 떨리는 마음으로 인사를 드리니 “아고, 이게 누구로!?” “야가 내 제자니더~” 하시며 자랑을 하신다. 눈물이 찔끔 났다.      


 교사가 된 후 종종 이때의 기억들이 떠오른다. 언젠가 우연히 길거리에서 소녀 소년들을 만나게 된다면 통쾌하고 시원하게 이름을 불러주고 싶다. 그러나 몹시 안타깝게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꿈이기도 하다. 일단 마흔 줄에 접어들고부터는 총명함이 더 떨어졌다. 가진 게 없으니 노력을 해보기로 한다. 의도적으로 유심히 소녀 소년들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찬란하고도 기막힌 세계다.     


 유심히 들여다보니 에피소드가 생긴다. 에피소드가 생기니 별안간 툭툭 생각난다. 유능한 직장인이란 자고로 퇴근 후엔 업무 스위치를 꺼버릴 줄 알아야 한다는데, 자꾸 떠오른다. 부작용이다. 미역국 끓이려고 불려둔 미역을 보면서도 생각이 나고, 납작한 내 뒤통수를 만지면서도 생각이 난다. 봄바람 살랑일 때, 가을밤 깊어갈 때, 기차가 지나갈 때, 산을 오르다가도 생각이 난다. 주로 같이 애태우고 고민했던 일들이 떠오른다. 찬란하고 기막힌 일들이 생각난다. 해결이 된 것도 있고, 안 된 것도 있다.      


 밥하려고 쌀을 씻을 때면 나를 쌀알쌤이라 부르던 열다섯 소녀들이 생각난다. 쌀알같이 생겨서 쌀알쌤이었다. 흰 티셔츠에 나+쌀알을 그려서 선물로 준 아이들이다. 쌀을 씻을 때마다 저들을 떠올린다는 걸 소녀들은 절대 모를 거다.    


 교실에는 통통 튀고 자기표현 확실한 소녀 소년들도 있지만, 자신의 세계에 집중하며 조용하게 지내는 소녀 소년들도 있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도 있고, 공부에 뜻이 없는 아이들도 있다. 후자의 소녀 소년들은 먼 훗날 길거리에서 우연히 선생님을 만난다면 황급히 유턴할 가능성이 크다.    


 ‘선생님은 절대 나를 기억 못 하실 거야’라고 확신에 찬 소녀 소년들을 화들짝 놀래주고 싶다. 세상의 중심에서 니 이름을 외쳐 버리는 게 내 목표다. 생각만 해도 통쾌하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도 당황하지 않는다. 그땐 이렇게 외치리라. “난 너를 기억하고 있어 흐흐 난 너를 기억하고 있다고---!!”  


                 열다섯 소녀들이 준 흰 티셔츠

              #쌀알쌤  #米人쌤(쌀인간) #나대지마  #밥이 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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