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였을까
따라잡을 수는 없었지만 그들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걸으니 어두운 산길을 같이 하는 동행자가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렇게 그들을 의지 삼아 걷다 보니 날은 칠흑같이 어두워지고 진 눈개비가 날리며 바람이 휘몰아쳤다.
앞에 길라잡이가 있었지만 전혀 좁혀지지 않았고, 희한하게 그들의 옷 색깔만이 선명하게 눈에 들었고, 오로지 발로 걷고, 마음으로 느껴야 했다.
조금씩 지쳐가고 힘이 빠질 무렵 저 앞에 불빛이 보이고 사람들의 소리가 들렸다.
세석 평전은 바람이 거칠게 몰아치는 곳으로, 이곳에서 텐트를 치고 야영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강풍이 워낙 심해서 밤에는 텐트가 날아갈 수 있는 상황도 겪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세석산장에 미처 가지 못하고 야영을 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원래는 야영을 하지 않는 곳인데, 그들도 같이 오던 일행이 늦어져서 할 수 없이 자리를 잡고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늦게 가면 세석산장에서 어차피 잘 곳을 확보하기 어렵기 때문에 빠른 판단을 한 듯 싶었다.
우리를 보더니 깜짝 놀란다.
“아니 이 시간에 그런 복장으로 여기를 오면 어떡합니까 내일 아침 신문에 나고 싶으세요”
산이와 목이는 멋쩍게 웃었다.
“계획한 건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네요 혹시 우리 앞에 오던 두 사람 보지 못했나요?”
“무슨 사람이요? 아무도 안 지나갔는데요 우리가 여기서 자리 잡은 지 2시간이 되었는데 누구도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여기는 원래 야영하는 곳이 아니라 사람들이 잘 모르는 곳이에요. 우리는 자주 오니까 그나마 여기서 자리 잡은 거지요”
“그럴 리가 없는데... 우리 앞에서 길라잡이 해 주던 것처럼 가던 그들은 누구였을까요”
"글쎄요 아무도 안지나 간 건 확실합니다"
"이상하네요 분명히 그들을 보고 걸어왔는데..."
“산신이었나 보네요. 우리를 만나게 해 주려고 그랬나 봅니다. 그대로 자면 얼어 죽어요 우리 거 빌려 줄 테니 여기서 자요”
밤새 바람은 차갑게 불고 얼어붙을 듯 추웠지만 그들이 빌려준 침낭 덕분에 얼어 죽지 않고 다음 날 새벽에 눈을 뜰 수가 있었다.
“감사합니다”
그들과 인사를 나누고 세석산장으로 향하는데, 쎅쎅 휘잉거리는 바람소리와 눈보라가 볼에 따갑게 부딪히고 홀로 서 있는 고사목이 눈에 들었다.
세찬 바람 앞에서 흔들릴지언정 부러지지 않고 꼿꼿하게 뿌리를 내린 의연한 나무들을 보노라니 힘이 났다.
이른 새벽 세석평전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장엄해서 숨이 턱 막히는 감동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손을 뻗으면 하늘에 닿을 것만 같았고, 얼굴을 때리는 차가운 눈보라에 정신이 번쩍 들고, 고사목에 핀 상고대가 눈을 사로잡는다.
장터목을 지나면 오르막이 시작되고 바위와 돌길이 많아지고, 날씨가 좋으면 햇살이 능선 위로 부드럽게 퍼지지만, 기온이 낮거나 겨울철이면 강한 바람과 안개가 시야를 가리기도 한다.
정상으로 가는 길목에서 문득 뒤를 돌아보면, 아래쪽에는 구름이 산허리를 감싸고 있다. 마치 하늘을 걷는 듯한 기분이 들고, 먼발치에는 지리산의 웅장한 능선이 끝없이 펼쳐진다.
그리고 마침내, 천왕봉 정상!
동쪽 하늘이 열리며 구름 사이로 붉은 태양이 솟아오르면, 그 순간만큼은 어떤 고된 산행도 잊힌다. 천왕봉에서 맞이하는 일출은 가히 장관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날이 흐려서 보지 못하였다. 수많은 카메라가 놓여 있었고 그들은 기나긴 기다림으로 오로지 해를 찍기 위하여 모인 사람들이라고 했다.
하늘과 맞닿은 이곳에서, 모든 등산객들은 저마다의 소원을 빌며 고요한 순간을 만끽한다.
일출을 찍겠다고 설치해 둔 카메라가 즐비했고, 신년에는 더 많다고 한다.
구름에 가려 일출은 보지 못했지만 운무 사이사이로 아스라이 비치는 햇살이 감격스럽다.
벼락같이 등반하여 어쩌다 보니 종주를 하였고 천왕봉에 도착했다.
어제 낮에 만나서 앞서갔던 일행을 다시 만났는데 우리를 보더니 반가워했고 우리도 살아서 만나게 되어 반갑다고 했다.
중산리로 하산하여 부산에서 왔다는 그들과 막걸리 한잔하고 작별을 했다.
생명의 은인이었지만 뭐 대단한 보답을 원하지도 않았고, 그저 짧게 스쳐 지나간 인연이라며 잘 가라고 손을 흔들었다.
어쩌면 그날의 산행은 평생에 한 번. 두 번은 있을 수 없는 경험을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리산은 변화무쌍한 날씨로 결코 만만한 산이 아니며 끝없이 이어진 능선은 다소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에는 거칠어지기 때문에 잠시도 방심할 수가 없는 산이었다.
그곳에서 산행을 하였고 지리산은 신비롭게 우리를 품어주었다.
새벽안개에 잠긴 능선과, 너덜길, 차가운 계곡물, 그리고 끝없는 하늘, 언젠가 다시 그 길을 걸을 수 있다면, 그때의 마음과 신비했던 길라잡이를 기억하며 천천히 조용히 걸어 봐야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날의 산행은 신기한 경험이었고, 풀지 못한 수수께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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