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날의 산행

산이 좋다

by 그리여

12 선녀탕 코스는 이 세상 것이 아닌듯한 신비로운 풍경으로 사람을 홀린다.

이곳은 마치 신선들이 내려와 거닐었을 것만 같은 곳, 맑은 계곡물과 우거진 숲이 만들어낸 태고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듯하다.


남교리에서 출발해 깊은 숲길로 들어서면, 발걸음마다 공기가 점점 달라진다. 푸른 이끼가 덮인 바위들이 길을 안내하고, 계곡물은 한없이 맑고 차갑고 우레와 같은 괴성으로 세상의 소음을 삼킨다.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일 만큼 투명한 물이 흐르는 계곡은 마치 오래전 선녀들이 목욕하던 비밀스러운 장소를 들키기 싫어하는 것 같다.

우거진 숲 속으로 암반을 타고 흐르는 물줄기는 바위를 깎아서 움푹 파인 곳에 보석 같은 물을 담는다.

황홀한 계곡에 혼을 빼앗긴다. 하지만 실제로는 8탕만이 있다.


설악산 중에 최고 승지가 어디메뇨 누가 묻거든 십이탕의 절경을 들기 전에는 아예 설악의 산수를 논하지 말라
한찬석 [설악산탐승인도지] 1960년 기록


중반부로 가면 길이 점점 가팔라지고, 암벽이 조각처럼 아름답다.

회사 산악동호회를 따라서 설악산 12 선녀탕 코스로 등반을 시작하였다.

찌는듯한 한여름이라 지치고 숨이 찼지만, 그래도 계곡이 아름다워 그나마 걷는 게 좋았다.

아무리 가도 길이 줄어들지 않는 것 같다.


신발 바닥에 사박사박 밟히는 흙의 느낌 바위의 거친 숨결이 손에 전해지는 소중한 이 순간을 눈에 담는다.

바람이 살랑살랑 불며 나무 가지를 흔들고 그 사이로 햇살이 삐져나오며 눈을 찡긋하게 한다.

마치 나무에게 윙크를 하듯이 그렇게 거북이 등짝무늬 같은 소나무를 어루만져 본다.


등산객들은 생각보다 이 아름다운 곳을 많이 찾지 않아서 혼잡하지 않게 산행을 즐겼다.

더워도 시원한 바람이 불어 여름 산행으로 좋은 곳이다.


조선 정조 때 성해응의 동국명산기에서도 '설악산의 여럿 명소 중 십이선녀탕을 첫 손으로 꼽았다'라고 기록하였다고 한다.


산이는 땀이 나지 않아 더위에 취약하여 여름 산행은 즐기지 않는데, 산악회는 여름에도 많이 다니니까 어쩔 수 없이 따라나섰다.

과장님이 선두를 보시고 회원들은 부지런히 쫓아간다.

“자네들 걷는 게 왜 이런가”

“힘들어요 너무 더워요”

“물 먹고 천천히 따라오세요”

과장님이 직원들을 다독이고 간식을 나눠주신다.

산이는 원래 물을 잘 먹지 않고, 땀도 나지 않는 체질이다.

사람들은 땀에 절어서 옷이 다 젖고 갈증에 물을 들이켜는데 산이 만이 홀로 땀도 안 흘리고 물도 먹지 않고 가고 있다.

가끔 계곡물에 손을 담그는 게 전부다.


직원들은 그런 산이를 신기하게 쳐다봤다.

“산이는 왜 물을 안 먹나”

“목이 안 말라요”

“이렇게 더운데 목이 안 마르다니 낙타로군”

직원들은 산이를 낙타라 불렀다.

산이는 멋쩍게 웃으며 길을 재촉하였다.

너무 더우니까 빨리 가는 게 최선이다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2 선녀탕에 홀려서 힘들어도 힘든 줄도 모르고 걸어갔다.

굽이굽이 흐르는 물을 감상하다 보니 입이 절로 벌어졌다.

손을 물에 담그고 첨벙거리고 있으니 직원이 놀린다.

“어이 낙타가 이제는 더운가 보네 물에 손을 담그네 하하”

그러곤 사진을 찍어준다.


바위에 걸터앉아 손을 담그면 온몸의 더위가 씻겨 내려가고, 흐르는 물이 피부를 스칠 때의 감촉이 상쾌하다. 설악의 품속에서 자연과 하나가 되는 순간이다.

에머럴드 빛깔에 정신을 놓고 쳐다보다 왠지 물에 뛰어들어갈 것 같은 충동이 느껴진다.

햇살은 물 위에서 반짝이며 부서지고, 바람은 등산객의 땀을 식혀준다.

직원들과 즐겁게 산행을 하니 더운 것도 가시고 빼어난 경치가 마음으로 훅 들어왔다.


설악산은 언제 와도 아름답지만 좋은 사람들과 오니까 더 황홀하게 느껴졌다.

과장님이 앞에서 지휘하시고 대리님이 뒤에서 후미를 챙기고 그렇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무사히 산행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땀이 나지 않으니 체온이 조절되지 않고, 갈증이 나지 않으니 물도 안 먹히고 산이에게 여름 산은 전신을 휘감는 얇은 나일론처럼 끈끈하게 착 달라붙어 얼굴을 벌겋게 달아오르게 함에도 오지 않을 수 없는 매력으로 다가온다.

더운 여름에 이렇게 오랜 시간 물을 먹지 않고 걷는다는 건 좋지 않지만 그래도 나는 안다.

산의 품에서 갈증을 해소하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지쳐도 발길이 멈추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이 좋아 산을 간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산행은 어떠한 순간에도 벅찬 감동을 준다.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듯한 이곳에서 어쩌면 정말로 선녀들이 목욕을 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돌아갈 시간, 발길을 돌리며 언젠가는 다시 이곳을 찾아서 오늘 남긴 발자국을 되새길 것이라고 다짐하며 아쉬움에 자꾸만 뒤돌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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