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지 마세요

벼랑 끝에서

by 그리여

산이가 산을 좋아하게 된 것은 내향적인 성향이 강했기 때문이다. 등산을 하면 굳이 얼굴을 보며 떠들지 않아도 되고 시선이 집중되지 않는 편안함이 있기 때문이다.

산은 언제나 산이에게 많은 것을 준다. 인연을 주었고 위안을 주었다.


이른 새벽 공기가 차갑게 얼굴에 부딪힌다.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하늘 아래, 나뭇잎들은 새벽이슬을 머금고 조용히 숨을 쉬고 있다.

산이와 미주는 한껏 들떠서 차가운 공기에도 움츠러들지 않았고, 상쾌하면서도 묵직한 공기 속에 설악산의 기운을 온몸으로 받고 있다.


산이 좋아 만난 친구들은 동이 트기도 전에 서둘러 산행을 시작했다.

산속으로 들어설수록 공기는 청량하게 코끝에 와닿고 살랑살랑 부는 바람은 차가워도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이른 새벽 아직은 어둑어둑하여 랜턴을 켜고 앞으로 앞으로 서로에게 의지하여 산길을 걷노라니 노래가 절로 나온다.

노래를 부르며 슬슬 올라가니 뒤따라오던 등산객이 노래까지 부르며 너무 쉽게 오르니까 신기하고 재미있다며 따라붙는다.

“하루의 산행을 시작하세 빠알간 배낭을 등에 메고 저어기 저 산을 끊임없이 올라가세”로 시작하는 하루의 산행이라는 산 노래를 허밍 하며 올라간다.

같이 오르던 등산객들은 친구들과 동행하면서 힘든 코스라도 즐겁게 오르니 산행이 훨씬 덜 힘들고 흥겹다고 한다.

어둠이 걷히고 환하게 비치는 햇살이 그들을 반긴다.


산을 진정으로 아끼는 친구들은 늘 그렇듯이 오늘도 산이 있음에 감사하면서 가벼운 발걸음을 옮긴다. 쓰레기도 주워서 봉지에 담는 걸 잊지 않는다.

그런데도 지치지 않고 올라가니 친구들 옆에 사람들이 같이 오르자고 나선다.

뭐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그냥 함께 올라간다.


한참을 가다가 산이가 뒤에 오던 등산객의 손을 잡아 올리려던 순간 뒤로 넘어진다.

"위험해" 하고 친구들이 말하기가 무섭게 산이는 낙엽을 밟아 발이 미끄러지고 벼랑 끝에서 떨어질 위기에 처했다.

그 순간 같이 오르던 등산객 중 한 명이 잽싸게 팔을 붙잡았다.


등뒤는 낭떠러지고 팔을 잡은 등산객은 사시나무 떨듯이 떨고 있다.

아래를 보니 바닥은 보이지도 않았고 '이대로 끝인 건가' 하는 생각이 잠깐 들면서 찰나의 순간에 많은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그래도 왠지 겁이 나지 않았다.

오히려 설악산이라 좋다는 생각을 겁 없이 했다.

마음이 편안해지니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이 났다.

정말 잠깐 동안에 스친 생각이 길지 않은 한평생을 축소해 놓은 듯이 보였다.


산이를 잡고 있던 등산객이 그제야 보였다. 얼굴은 파랗게 질려서 떨고 있는데도 잡은 팔을 놓지는 않았다.

산이는 그 등산객에게

“떨지 마세요! 전 괜찮아요 가만히 계시면 제가 팔을 잡고 올라갈게요”

그러곤 그 등산객의 팔을 잡고 배낭을 휙 집어던지고는 바로 선다.

큰일 날 뻔한 상황이었다. 이 모든 일은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하마터면 저승길로 등반할 뻔했다.


구해 준 등산객은 놀라서 털썩 주저 않았다.

‘감사합니다!’ 산이는 그분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일으켜 세워주었다.

산이보다 더 떨고 있던 등산객은 긴 숨을 내쉬고는 '다행이다!' 하고 환하게 웃는다.

그리고는 이내 눈물을 흘린다.

"왜 우세요" 산이는 당황하여 물었다.

"사실 제가 하는 일마다 잘 안되고 삶의 의미가 없어서 공허한 상태였거든요. 산에 올 때마다 집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언제든 죽을 각오로 왔거든요"

"산에 다니는 사람들은 집 정리하고 나오는 사람들이 많아요. 저도 늘 그렇게 하고 나와요. 어쩌면 살아오겠다는 다짐 같은 것이겠죠"

"오늘 전 제 자신이 한심하다고 느꼈어요. 아까 손을 잡았을 때 '나도 떨어져서 죽으면 어쩌나' 하고 겁을 먹었거든요. 언제 죽어도 좋다고 생각한 건 자만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러셨군요 그 상황이 되면 누구나 본능적으로 그럴 거라 생각해요"

"열심히 살아갈 구실을 오늘 찾았어요. 공허하다고 한건 엄살이었나 봅니다"


뒤따르던 사람들도 도움을 받았던 등산객도 그제야 안심하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다.

뜻하지 않게 위험한 상황을 나누게 된 사람들은 돈독한 동지애가 생겨서 서로가 서로를 챙겨주면서 올라갔다.

산이 맺어준 인연은 오늘도 친구들에게 품을 허락해 주었다.


설악산에는 위험한 구간이 많기 때문에 잠시라도 방심하면 안 된다.

친구들은 산에 대한 경험이 많았고, 체력도 되었기 때문에 쉽게 올랐지만, 잠깐의 실수가 하마터면 큰일로 이어질 뻔했기에 미암함에 어쩔 줄을 몰라했다.

산은 언제 어디서나 위험한 순간이 도사리고 있다.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한발 한발 조심히 올라야 거친 등산로가 그들의 발걸음을 이끌어 준다.


우여곡절 끝에 그분들과 같이 무사히 등반을 하고, 설악산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눈을 떼지 못했다.

“통나무가 숯이 되고 숯덩이가 재가 되어도 밤새도록 불러보는 그리운 산 노래여”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마지막 돌덩이를 밟고 올라서자, 눈앞에 손을 뻗으면 잡힐듯한 하늘이 펼쳐진다. 끝없이 이어진 산등성이에 빠져들어 눈을 뗄 수 없었고, 웅장함에 가슴이 울렁인다. 저 멀리 동해의 푸른 수평선, 그리고 내리쬐는 태양 아래 반짝이는 설악의 능선들. 볼에 부딪히는 차가운 바람은 여전히 세지만, 그 바람 속에서 두 팔을 뻗고 숨 한번 크게 쉬며 산이 주는 자유를 온몸에 새긴다.


설악산은 언제나 그곳에 있고, 친구들은 그 이후로도 계속 산을 올랐다.

사시사철 찬란한 빛으로 빛나는 설악산은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손짓하고 그곳에서 사람들은 산의 웅장함과 예술 같은 바위에 놀라고, 거칠고 아름다운 등산로에 놀라고, 눈에 다 담을 수 없는 경치에 매료되어 다시 오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게 된다.


세르게이 트로파노프의 바이올린곡 몰도바(집시의 열정)의 애절한 선율이 생뚱맞게 귀에 들리는 듯하다.

애잔하고 서글프고 격정적인 연주를 하며 발칸의 집시들이 거주하는 몰도바를 기리듯이, 우리는 찬바람이 귀를 아리게 하는 계절이 오면 미치도록 산을 그리워한다.


위험하지만 포기할 수 없는 산의 매력에 친구들은 산에 오르고 또 오른다.

같이 가는 이들이 있어 등산은 더욱 즐거웠고 힘이 들어도 힘이 든 줄 모르게 오르고 있었다.

90년대 우리의 산은 낭만이 있었고 거칠었고 인정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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