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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살처럼 May 01. 2024

낡은 책처럼, 편지처럼

 마음은 아직 대학생인데 벌써 마흔이 넘었다. 한 살 한 살 나이가 들수록 겁이 난다. 눈가의 주름이 조금씩 늘어가는 만큼 나는 지혜롭게 살고 있는 걸까. 혼자 힘으로 15년 된 중고차와 30년 된 아파트를 마련했지만 세상은 건실함 보다는 '낡음', 내 나이에 갖춰야 할 재력에만 주목한다. 그런 시선이 싫어 나는 '집도, 차도 없다' 말하며 진실을 감추기도 한다. 

'왜 낡은 것이 빈곤과 맞닿아 있으며 암묵지는 늘 가난 뒤에 숨겨야 하는가?' 


철학자처럼 농도 짙은 고민에 비해 내가 찾은 답은 투박하고 저질스럽다. 

'로또 복권이 답이다.' 

함박눈처럼 돈이 쏟아지길 바라며 나는 한 달에 한번 로또 복권도 산다. 벼락부자라도 되면 느릿느릿한 내 인생을 만회할 수 있지 않을까. 이리도 돈만 바라고 있느니 아무래도 '지혜로움'이나 '어른다움'과는 아직 거리가 먼 것 같다.




 재물에 미혹한 내게 '정신 차려!'라고 각인시켜 줄 대상이 있는 건 그나마 다행이다. 사람? 아니다. 바로 10년 된 수험서와 30년 된 낡은 편지다. 

집에 놀러 온 친구는 책장에 무겁게 꽂힌 낡은 공무원 수험서를 보며 깜짝 놀란다. 

"야, 이 낡은 책들을 버리고 않고 아직 보관하고 있어? 공부할 때 생각나서 괴롭지 않아?"

친구의 말과 달리 나는 되려 기억하고 싶은 순간이 떠 오른다.   

2년 6개월 준비했던 공무원 시험에 또 한 번 떨어졌던 그 해 봄, 나는 서른네 살이었다. 점점 줄어드는 통장잔고만큼 내 자존감도 바닥을 향했다. 취업에 실패하고 등 떠 밀리 듯 시작했던 공무원 시험마저 계속 불합격하니 난 뭘 해도 안 되는 인간인가 싶었다. 한 동안 패잔병의 얼굴을 한 채 독서실을 왔다 갔다 했다. 그 모습을 독서실 사장님이 봤던 걸까. 점심을 먹으러 가던 찰나 사장님이 미소 짓는 얼굴로 반찬통을 건넸다. 

"햇살씨! 반찬 만들면서 좀 더 만들었어요. 한번 먹어 봐요."  

"고맙습니다. 사장님..."


 집에 와서 보니 반찬통에 메모지가 붙어 있었다.

'내가 사람을 좀 잘 알아봐요. 그동안 독서실에 오던 수많은 친구들을 봐 왔잖아요. 햇살씨처럼 열심히 하는 사람들은 늘 결말이 좋아요. 그러니 힘내요. 봄 나물이랑 밥 한 끼 든든하게 먹어요.'   

돌나물과 냉이 무침에 밥 한술 뜨니 입안에선 쌉쌀한 식감이, 눈에선 눈물이 펑펑 터졌다. 독서실 사장님의 마음이 느껴졌다. 반평생 고시 공부한다고 가정에 무책임했던 남편과 이혼 후 자그마한 동네 독서실을 20년 간 운영하며 아이 둘을 키우던 엄마 가장. '삐걱삐걱' 소리 내며 늙어가던 독서실 책상처럼 사장님은 자기 삶이 흔들리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이 세상 누구보다 단단했다. 불안감에 시들시들해진 나 같은 학생들에게 사장님은 늘 봄나물같이 생기 있는 말을 전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런 건강한 기운만 담은 나물 반찬에 밥 한 공기 뚝딱하니까 부적 쓴 듯 마음이 든든해졌다.     

'그래 조금 늦은 게, 돈 좀 없는 게 뭐 대수라고!'         

그날 이후 나도 사장님처럼 생기 있는 마음으로 공부에 집중할 수 있었다.   




'늘 누구에나 힘이 되어 주고, 스스로를 깨치는 강한 마음의 소유자이길'

중학교 때 좋아했던 선생님이 보내 준 편지의 마지막 한 줄이다. '이런 마음으로 살아야지' 다짐했지만 30년이 지난 지금도 잘 지키지 못하고 산다. 각자도생의 시대라 불릴 만큼 각박해진 세상살이에 '나도 힘든데 누굴 도와'라는 생각이 침습하면 스물다섯 살의 내가 외치는 소리가 귓가에 들린다.

'마음 나누는 건 돈 드는 일이 아니거든!'        

그제야 '앗차' 싶다. 이 편지는 불길 속에서도 살아남은 마법의 편지다.


"햇살아 큰일 났다. 집에 불이 났다. 빨리 와라!"

스물다섯 대학교 4학년 봄날, 수업을 듣다가 아버지의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집으로 부랴부랴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별일 아닐 거라 여기며 생각했다. 

'넉넉지 못한 집에 화재까지 날리 없다. 신도 양심이 있으면 더한 시련은 주지 않을 거야' 

 간절한 나의 바람과 달리 우리 집은 누전으로 인해 전부 불에 타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머리도 하예지는 것 같았다. 먼저 도착한 형과 누나가 잿더미 앞에서 엉엉 울고 있었다. '정말 지랄 맞은 인생이다' 싶었다. 슬픈 아니라 너무 억울해서 손을 부르르 떨며 나도 한참을 울었다. 감정을 추스르고 현장을 정리하다 온기가 남은 잿더미 속에서 타다나무상자를 발견했다. 조금 그을렸지만 내가 애지중지하던 보물상자라는 걸 한눈에 있었다. 상자 속엔 사진 몇 장과 선생님의 편지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화재가 남긴 건 손에 나무 상자 그것뿐이었다.  


 새 집이 정해질 때까지 우리 가족은 친구나 친척집으로 잠깐 동안 흩어져 살았다. 나는 학교 앞 고시원에 방을 잡았다. 원점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기분이었다. 속옷과 양말, 치약과 칫솔 사소한 하나까지 전부 구입해야 했으니 말이다. 얇은 담요 하나 덮고 자다가 추위에 잠이 깬 어느 날은 난민이 된 것 같은 기분에 너무 서러웠다. 새 집으로 다시 모인 날 우리 가족은 흩어진 마음도, 물건도 다시 모았다. 그날 우리는 아프고 무너진 마음을 어떻게 일으켜 세워야 하는지 깨달은 사람들처럼 잘 버텼다며 서로를 칭찬했다. 


 가끔 편지를 꺼내 들면 화재로 움츠렸던 순간이 떠 오른다. 그런 내 모습이 안쓰러워서일까. 내겐 잿더미에 남아 있던 온기같이 따뜻한 마음이 남아 있다. 나는 스포츠 경기에서 승리한 선수보다 경기에서 지고 풀 죽어 있는 선수에게, 주인과 함께 산책하는 예쁜 강아지 새끼 보다 잘 곳이 없어 여기저기 헤매는 길고양이에 더 눈이 간다. 어쩌면 '누구에게나 힘이 되어 주라'는 선생님의 메시지엔 이렇게 축축하게 젖은 다른 존재의 마음도 잘 헤아렸으면 하는 바람이 담긴 게 아닐까.  




 고속도로를 달리 듯 앞만 보고 달리는 사람들 틈에 끼어 살면 혼자 시골길을 걷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 나도 좀 빠르게 돈 많은 부자처럼 살고 싶다. 아니다. 세상은 더불어 사는 거니까 타인의 마음도 들여다보는 게 맞다. 왔다 갔다 하는 마음, 알면서도 잘 모르겠는 마음을 언제쯤 극복하고 나는 진짜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어린아이처럼 어찌할지 몰라 나는 지금도 열 살 먹은 수험서와 서른 살 된 편지를 펼쳐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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