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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살처럼 Apr 17. 2024

'빚'이 아니라 '빛'나는 삶

"내가 그때만 생각하면 진짜.."

누나는 옛날이야기만 하면 눈물의 여왕이 된다. 서럽게 만든 주인공은 엄마다.   

"우리 집은 사춘기고 오춘기고 없다. 힘들게 돈 벌어 주면 공부나 할 것이지 자꾸 투덜거려"

"동생보다 공부도 못하고! 돈 아깝게 말이야. 학교 때려치우고 공장이나 가!"

엄마는 생전에 아들, 딸 차별을 하며 누나에게 상처 주는 말을 자주 했다.


 어린 시절 엄마는 어려운 집안 사정으로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외삼촌들만 공부하는 게 억울해서 외할아버지에게 학교에 보내 달라 떼를 쓰다 '계집애가 무슨 공부냐?'며 혼이 났다고 한다. 비슷한 경험과 상처가 있음에도 엄마는 대물림하듯 누나에게 모진 말을 했던 걸까. 자꾸 !  하니까 당시엔 돈이 부족해서 그런 거라 여겼. 가난은 때로 마음의 결핍을 낳고, 결핍은 가시 돋친 말을 낳는다. 그럼에도 세상엔 가난해도 따뜻하게 사랑하는 사람들이 다. 엄마에게  부족한 건 돈이 아니라 '사랑'이었다.




 엄마가 하늘에 별이 되던 해, 누나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장례를 치르고 다시 등교하기 전날 밤 나는 잠을 뒤척였다.

'내일부터 점심 도시락은 어떻게 하지? 굶어야 하나?'

'툭! 툭! 툭! 툭! 툭!'

다음날 이른 새벽, '툭' 하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누나가 준비한 5개의 도시락(본인 도시락 1개, 형 도시락 2개, 내 도시락 1개)이 쌓이는 소리였다. 툭! 툭! 소리는 '도시락 걱정 마!'라는 외침 같았다. 좌우로 높이 쌓인 도시락은 견고한 요새처럼 보여서 마음이 든든했다. 가방 속에 들어가던 도시락의 따뜻한 온기는 엄마 없이 서늘했던 마음을 와락 앉아 주었다. 점심시간이 되면 아이들은 반찬이 뭘까 궁금해하며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소시지, 돈가스, 소고기..' 친구들의 화려한 반찬을 보며 나는 죄지은 사람처럼 천천히 도시락을 열었다. '배추김치, 열무김치, 깍두기..' 내 반찬은 항상 '김치'였지만 단 한 번도 누나에게 반찬 투정을 하지 않았다. 뜨거운 밥으로 뚜껑에 송골송골 맺힌 물방울이 누나의 고된 흔적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툭! 툭!'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알람시계처럼 도시락 놓는 소리가 들리던 아침, '어? 다섯 번이 아니라 왜 두 번만 들리지?' 얼굴을 덮고 있던 이불을 살짝 걷어 내니까 벽에 기댄 누나의 모습이 보였다. 도시락을 싸다가 코피가 나서 한 손으로 코를 막고 있었다. 짠해진 마음에 다시 이불을 덮었다. 어린 시절, 엄마 없이 혼자 집을 지킬 때면 나는 이불을 뒤집어쓴 날이 많았다. 무서움을 느껴 엉엉 울면 이불 안이 항상 뜨거웠다. 누나의 코에서 흐르는 코피처럼 그날도 내 이불속은 뜨거웠다.




 시간이 흘러 행복한 결혼 생활을 이어가던 누나가 어느 날 청천벽력 갔던 소식을 전해왔다.

"햇살아! 매형이.."

누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엉엉 울었다. 매형이 뇌경색으로 쓰러졌던 것이다.

"엄마 울지 마. 제발 울지 마.."

아이들(조카들)도 얼굴이 시뻘게져서 따라 울었다.

"내 인생은 왜 이럴까. 정말 죽고 싶다..."

누나의 풀 죽은 목소리를 들으니 세상 참 불공평하구나 싶었다. 인생에는 사계절이 있다고 하는데 왜 누나에겐 겨울만 계속되는 걸까.


 모든 걸 놓고 싶어 하는 할 만큼 힘들어했지만 아이들을 위해 누나는 다시 기운을 차렸다. 그리고 다시 도시락을 쌌다. 반신불수로 누워 있던 매형을 위해 현미밥, 토마토, 양배추로 만든 '채소'도시락을 1년 넘게 챙겼다. 예수의 부활처럼 누나의 도시락은 기적을 일으켰다. 불편한 걸음걸이지만 매형이 혼자 걷게 된 것이다. 도시락에 담던 채소들처럼 다시 살고자 하는 누나의 파릇파릇한 마음을 하늘이 헤아려 준 것 같았다.

 



 얼마 전 누나가 음식점을 오픈했다.

"손님! 불고기 덮밥 포장 나왔어요. 서비스도 같이 넣었어요."

누나는 지금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 도시락을 싼다. 바쁘고 힘들 텐데 친절한 마음까지 담는다. 누군가를 위해 내어 주는 그 마음이 신기해서 물었다.

"누나는 도시락 만드는 일이 재밌어?"

"재밌긴! 힘들어 죽겠다. 가게 오픈할 때 빌린 대출금은 언제 다 값냐. 나이 오십에 남은 건 빚 밖에 없다."

힘들다는 건 공감하지만 빚밖에 없다는 말은 동의하지 않았다.


"엄마, 고생했어요. 사랑해요."

"엄마 힘들까 봐 설거지해 뒀어요. 사랑해요."

늦은 밤 장사를 마치고 귀가하면 조카들이 '사랑한다'는 말로 누나 품에 안긴다. 그 모습을 보면 가슴이 뭉클하다.

'한 사람이 어른이 돼서 세상을 살아갈 때 힘이 되는 것은 어린 시절에 받은 사랑과 지지다. 사랑받고 존중받고 보호받았던 기억. 그 기억이 살면서 겪어야만 하는 힘든 고비를 넘게 한다'는 김중미 작가의 말과 다르게  누나는 큰 사랑과 지지를 받지 못하고 성장했다. 그럼에도 힘든 고비를 넘기며 배려심과 사랑이 충만한 아이들을 키워 냈다. 사랑받지 못한 존재가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존재'를 키워 낸 삶. 그건 '빚'만 남은 삶이 아니라 그냥 '빛'나는 인생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팍팍한 현실에 힘들어하는 누나의 모습을 보면 여전히 안쓰럽다. 하지만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누나에겐 툭! 툭! 쌓아 올리던 도시락처럼 단단하고 따뜻한 마음이 있으니까. 이젠 누나도 남이 아닌 자신의 도시락을 싸면서 활짝 웃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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