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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살처럼 Apr 03. 2024

정말 좋아합니다

 재밌게 읽었던 책은 반복해서 읽는다. 재독의 힘은 신기하다. 전과 동일한 내용을 읽고 내 관점과 생각이 달라졌음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만화책도 예외는 아니다. 학창 시절에 즐겨 읽던 슬램덩크라는 농구 만화는 여성스러우면서 소심했던 내게 '남자다움'을 찾아 주었다. 마치 칼 한 자루, 말 한 필로 적진을 향해 달려가는 장수의 용맹함을 되찾는 기분이랄까.


 니체를 읽어야 할 마흔에 슬램덩크를 다시 읽었다. 역시 예전과 달랐다. 가려져 있던 주인공 강백호의 삶이 보였다.

"이 농구화는 중고니까 깎아 주세요"

백호는 신발가게 주인에게 고작 300백 원을 건넨다. 마이클 조던의 농구화를 거저 달라고 하는 뻔뻔함. 예전엔 우습기만 했는데 뭔가 마음이 짠했다.  

'이 자식 돈이 구나...'


 홀아버지 밑에서 성장한 걸로 추정되는(엄마는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고교생 백호는 학교 공부는 뒷전에 싸움질만 하는 전형적인 '문제아'다. 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모시고 가야 하는 순간, 싸움을 걸었던 상대가 나타나 길을 막는다. 결국 아버지는 사망한다. 나도 홀아버지 밑에서 성장했기에 장면에서 가슴이 뭉클해졌다. 예전엔 아무렇지 않게 넘겼는데 울컥하다니 진짜 '아재'되었나 보다.     


 "농구... 좋아하세요?"


 여주인공 채소연의 물음에 백호는 자신이 진정한 '바스켓맨'이라 답하며 농구를 시작한다. 사실 백호는 농구를 모르는 전혀 모르는 풋내기다. 그저 한눈에 반해 버린 소연게 잘 보이고 싶어 농구를 시작했을 뿐. 이런 단순함에도 동질감이 느껴졌다. 대학에 입학하고 나도 안 하던 공부를 시작했다. 첫사랑 J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다. 농구공이 아닌 펜을 잡았다는 점에서 차이는 있지만 말이다.   




 대학교 입학 후 나는 등록금 문제로 공부에 매달렸다.

'잘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수우미양가'순으로 성적을 매기던 학창 시절, 나는 일부 과목을 제외하고 '양가' 등급만 받던 열등생이었다. 공부 못하던 친구들이 '너도 양갓집 자식이냐'라고 놀리기도 했다. 대학교 첫 중간고사를 앞두고 J가 말했다.


"오빠, 예상 답안으로 쓴 글이 너무 멋져! 역시 공부 잘하는 사람은 달라."

 어라? 내가 공부를 잘한다고? 그때부터 나는 열등생이었던 과거를 세탁하고 공부 잘하는 오빠로 변신했다. 멀쩡한 안경도 좀 더 똑똑해 보이는 걸로 바꿨다. 대학 공부는 서술형 시험이 주를 이뤘다. 나는 신문 칼럼이나 책에 있는 문장을 닥치는 대로 베껴 쓰며 실력을 키웠다. 색 볼펜으로 쓰고 또 쓰면서 지저분해져 버린 손목. 천천히 지워지던 볼펜자국처럼 내 글 쓰기 실력도 조금씩 향상되었다.


"좋으면 적극적으로 대시해 봐"

내가 J를 좋아하는 게 티가 났는지 주변 친구들은 좀 더 다가가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용돈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여자 친구에게 선물을 마련하던 친구들을 보니 엄두가 나지 않았 그럴 돈도, 시간도 없었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잘 되면 J에게 이런 궁핍한 마음을 들킬 것만 같았다. 아쉬움이 생길수록 혼자 다짐했다.

'성공해서 J에게 당당한 모습으로 다가갈 테다.'




 J가 다가오려던 순간도 있었다. 시험이 코앞이면 도서관에 자리를 맡아 두어야 하기 이른 새벽에 일어났다. J와 함께 공부하는 날은  차를 타러 버스 정류장 가는 길이 너무 설렜다. 아침 댓바람이 마음을 간지럽혔고, 일찍 일어난 샛별은 방긋 웃었다.


"복사해 준 오빠의 필기 노트, 나한테만 ?"

같이 공부하던 어느 날 J가 물었다. 두근두근! 잘 대답해야 한다.

'응, 당연지!'

빨리 이렇게 말해! 속으론 몇 번이나 외쳤지만 다른 말을 하고 말았다.

"다른 사람도 빌려 줬어..."

"아.. 그렇구나..."

'등신, 머저리, 바보!' 빼곡히 적힌 노트 필기만큼 J를 향한 마음만으로 가득 찼는데 다른 말을 하다니! 내가 너무 어리석게 느껴졌다.  


 벚꽃이 활짝 피었던 4학년 봄, J와 집으로 가는 버스를 함께 탔다. 맨 뒷좌석에 J와 나란히 앉았다.


"대학교 4년 동안 공부하는 데 오빠 도움이 정말 컸어. 마음 알지?"

 어떤 마음인지 묻고 싶었지만 나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살짝 열린 창문으로 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창가에 앉은 J의 머리카락이 얼굴에 닿아 향긋한 샴푸향이 코를 찔렀다. 창밖엔 멀리 보이는 벚꽃 잎이 수줍게 떨어지고 있었다.  




 'J와 잘 되고 싶다'고 가난한 사랑 노래를 불렀지만 마음먹은 대로 잘 되지 않았다. 대학 졸업 후 취업에 실패하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다. 돈 천 원이 모자라 떡볶이를 살 수 없어 분식점을 지나치던 어느 봄날, J가 결혼한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 봄바람은 매년 따뜻하고 다정했는데 그날은 너무 맵게 느껴졌다.

'떡볶이도 편안하게 못 사 먹는 인생인데 이거 너무 하다.'

예수, 알라, 부처 모두 원망하다가 목울대가 뜨거워졌다.


'이제 어떻게 살아갈까?'

 학업의 압박과 취업의 굴레에 빠져 한 걸음 내딛기도 버겁던 시절, J의 존재는 나를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게 했다. 이젠 마음에서 J를 비워 내야 하니 삶의 의지가 꺾이는 기분이었다. 꽤 오랜 그리움과 아쉬움으로 점철된 시간, 그 끝에 남은 건 글쓰기였다. '쓰는 사람'이 새로운 인생 목표가 되었다. J에게 나는 글 잘 쓰는 오빠였다. 펜을 잡아야 그런 내 모습이 J의 기억에서 영원할 것 같다. 그 기억을 지키고 싶다. 투박하고 어색해도 쓰면서 계속 설레고 싶다.       


 슬램덩크 마지막 장면. 얼떨결에 시작했던 농구가 진짜 좋아진 백호는 소연에게 말한다.


"정말 좋아합니다. 이번엔 거짓이 아니라구요"  


올해도 벚꽃이 피었다. 벚꽃 잎이 또다시 수줍게 떨어진. 하얀 종이에 가장 먼저 써야  문장이 떠 올랐.


'정말 좋아합니다. 이번엔 거짓이 아니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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