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2년쯤 태어났다면 끔찍했을 것 같다. 10년 후인 1592년에 임진왜란을, 뒤이어 1627년 정묘호란과 1636년 병자호란을 겪어야 하기 때문이다. 전쟁을 세 번 겪은 것처럼 고된 삶을 산 사람이 있다. 아버지다.
"내 쪼매날 때(어릴 때) 일본 이름이 오미야 헤이 뀨였다."
1938년생인 아버지는 다섯 살 되던 해에 일제에 의해 창씨개명을 당했다.
"아버지는 살아 있는 역사책이네예"
추임새 넣듯 내가 맞장구를 치면 아버지는 신나서 이야기 덧붙인다.
"공식 이름이 그랬고 집에선 '사브로'라고 불렀다 아이가"
'굳이 또 다른 이름을 집에서 지을 필요가...그건 자체 창씨 개명인데요?'라고 물으려다 이유가 있었겠지 싶어 웃어넘겼다.
한번 흥이 나면 아버지의 다음 이야기는 술술 나온다. 8살 무렵, 아버지의 엄마(즉, 내 할머니)는 콜레라를 앓다가 어려운 집안 형편으로 약 한번 못써 보고 돌아가셨다. 초등학교 땐 잠시 고모 댁에 맡겨졌는데 고모가 노동 착취 수준으로 아버지께 일을 시켰다. 13살 때는 6.25 전쟁이 터졌다. 펑펑 터지는 포탄 소리에 다리를 덜덜 떨며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낙동강을 건넜다.
현기증이 난다. 고작 13년 정도 살았는데 창씨개명, 사별, 노동착취, 6.25 전쟁을 경험하다니! 그만 불행했으면 좋겠지만 끝이 아니다. 6.25 전쟁 후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모시다 마흔 살에 늦장가를 갔다. 15년 정도 결혼 생활을 하다가 아내(나의 엄마)를 하늘로 떠나보냈다. 남아 있는 자식 셋을 건사하기 위해 65세 넘어까지 바늘 공장에서 일해야 했다.
"햇살아! 가서 막걸리 좀 사 온나."
엄마와 사별 후 공장에서 일하던 시기, 아버지는 집에 오면 매일같이 막걸리 심부름을 시켰다.
"크으.. 앗따 억시 달다."
'에이 거짓말! 달리가 없다.'
술에 대해 전혀 몰랐던 나는 첫 잔을 비우고 내뱉는 아버지의 한 마디가 너무 싫었다. 단 음식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배웠는데 달다고 말하며 막걸리를 마신 아버지는 자주 화를 냈기 때문이다.
"때리 치아라 인마!"
술 마신 아버지는 때려치우라는 말을 자주 했다.
고시 공부를 하던 형이 힘들다고 이야기했을 땐
"나도 힘들다. 하기 싫으믄 때리 치아라 인마!"
놀다가 조금 늦게 귀가한 누나에겐
"니 맘대로 살 꺼믄 때리 치아라 인마!"
만족스럽지 못한 성적표를 들고 간 내게
"책가방만 들고 왔다 갔다 할꺼믄 때리 치아라 인마!"
날카로운 말로 상처 주는 아버지가 그땐 참 원망스러웠다.
"크으.. 달다. 달아"
술에 눈을 뜬 나도 술을 마시면 이제 아버지와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취업 실패, 시험 불합격, 가난하고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이성에게 차였던 때 처음으로 알았다. 세상의 쓴맛 보다 술은 훨씬 달다는 사실 말이다. 오랜 노동으로 손에 박인 허연굳은살처럼 희뿌연 막거리를 마시던 아버지는 훨씬 더 술맛이 달았을 터.
'전쟁과 격동의 시기를 살던 두려움에 한 잔'
'어린 시절 사별한 어머니가 그리워 한 잔'
'먼저 간 아내 그리워 한 잔'
'삼 남매를 홀로 책임져야 할 부담감에 한 잔'
아버지는 그렇게 한 잔 한 잔 따르며 설움을 달랬을지 모른다. 겪어도 겪어도 시련이 계속되었던 삶. 자식들에게 때려치우라는 말을 달고 살았던 아버지는 혹 자신의 삶을 때려치우고 싶었던 건 아닐까. 어른이 되어 아버지의 삶을 다시 들여다보니 왠지 가슴이 먹먹하다.
얼마 전 안부차 전화를 드렸더니 아버지가 말했다.
"괜찮은 아가씨는 아직 안 생깄나? 어려운 일 생기면 이야기 해래이. 얼마 없지만 돈 좀 주께."
한평생 상처 주는 말만 하고 무뚝뚝한 아버지였는데 따뜻한 말을 들으니 당황스러웠다.
"아이고 됐으요. 노령연금 모은 거 얼마나 된다고! 그냥 아버지 쓰이소"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지만 예전보다 작고 탁해진 아버지의 음성에 자꾸 마음이 아렸다. 아버지는 평생 강한 사람일 거라 생각했고, 나도 아버지의 차가운 말 때문에 측은한 마음이 생기지 않을 거라 여겼다. 나도, 아버지도 좀 따뜻하게 약해진 걸까.
조만간 막걸리 한 병 사들고 아버지를 찾아봬야겠다. 그리고 한 잔 따라 드리며 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