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햇살처럼 Jun 12. 2024

아프니까 꼰대다

말은 디테일에 있다

"공부 좀 해!

등 뜨시고 배부르니 등록금 아까운지 모르지?"


 벌 쏘 듯 톡 쏘고, 꼬장꼬장한 어른이나 할 법한 말. 스물두 살 대학생이던 내가 친구들에게 했던 말이다. 꼰대같이 말하면 친구들은 버럭 화를 냈다.

"맨날 훈계질할 거면 우리랑 왜 만나는 거냐!"

"이 애 늙은이야. 니가 우리 엄마냐!"

친구들은 씩씩 거리며 그렇게 하나 둘 내 곁을 떠났다.


관조하는 시간을 가지면 그 시절 나의 또 다른 목소리가 들린다.

'나 지금 힘들고 외로워.'

거친 말에 숨겨진 본심이었다. 심리학에선 독립적인 성향을 '안에 있는 주민'으로 부른다. 당시에 나는 외로움을 독립심으로 포장했다. 마음에 성벽을 쌓고 자유로운 척했다. 지나치게 높은 성벽을 쌓고,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성문을 걸어 잠갔다는 사실은 모른 채로.

 

 어쨌거나 등록금 때문에 힘들었던 그 시기.

'아침엔 도서관 직행, 학교 가는 버스 안은 영어 공부, 학교 수업, 단기 아르바이트.'

빡빡한 스케줄은 알려 주었다. '경제적 빈곤과 시간의 빈곤은 같은 말이야'라고.


'너에게 난 해 질 녘 노을처럼 한 편의 아름다운 추억이 되고~' 유행하던 노래 가사 같은 연애, 비 오는 금요일 수업 땡땡이, 친구들이 누리던 평범한 낭만은 내겐 부러운 사치였다. '등 뜨시고 배부른 것들'은 그렇게 나온 말이었다.    




 친구들에게 가시 돋친 말을 내뱉던 모습. 누군가를 아주 많이 닮았다. 아버지다.   

"때리 치아라! 집에 돈 없는 거 알면 더 열심히 공부해야지!"

 가을바람에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아버지의 손에서 내 성적표가 떨어졌다. 중학교 2학년, 공부하는 친구들과 도서관을 다니면서 전교 석차가 껑충 뛰어올랐다. 칭찬을 기대했는데 질책이 돌아오니! '공부 한 번 제대로 해 봐야지'라는 각오사라졌다. 전교 10등 안에서 놀던 형에 비해 전교 114등이라 적힌 성적표. 아버지에겐 분명 만족스럽지 않았을 테다.


 오랜 시간 섭섭한 감정이 들었다. 하지만 세월과 함께 서운함은 옅어지고 아버지의 그림자도 봐야 할 나이가 되었다. 너무 짧은 가방끈, 아침 6시쯤 집을 나서 밤 9시에 귀가하는 바늘 공장 노동자. 그런 아버지 삶에 칭찬 같은 따뜻한 말은 쉽지 않았을 테다.   


 2년 후 고등학교 1학년, 문과냐 이과냐 선택의 갈림길.

"형! 어디로 가는 게 맞을까?"

"고시 같은 큰 시험 준비 안 할 거면 문과 가지 마. 취직 못해서 굶어 죽을래?"  

"아... 그래?"

IMF 직후라 취업이 더욱 어려웠던 그 시절, 고시에 합격 못하면 죽어 버리겠다는 각오로 공부하던 형의 말을 무시할 순 없었다. 결국 이과를 선택했다. 수학도 못하는 게 이과로 갔으니 결과는 참담했다. 내신 성적은 바닥을 쳤고, 수능은 확실(?)하게 망쳐 버렸다.


 선택은 내가 했으니 형을 원망하진 않지만 약간의 아쉬움은 있다. '굶어 죽을래!' 보다 '네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 그게 답이야.'라고 말해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허나 애초에 이런 가정을 하는 건 무리였다. 카운트 다운처럼 줄어 두는 시간과 돈의 압박에 합격만 바라보는 형에게 따뜻한 말을 해 줄 여유 공간이 있었을까.




 대학 시절 나는 꼰대였다. 누구가 반문할지 모른다. '꼰대가 아니라 마음이 아팠던 아니야?'라고. 그것도 맞는 말이다. 하지만 꼰대가 뭔가. 자신의 생각이나 방식이 항상 옳다고 믿는 행동이다. 내 삶이 힘드니 상대가 그런 마음을 동조해 주기를 강요하듯 거친 말을 내뱉던 모습. 분명 꼰대 짓이었다. 예전의 나, 아버지, 형 모두 꼰대였다. 다만, 일반적인 꼰대와는 조금 결이 다르다. 우린 '아프니까 꼰대'였다.


 하나, 둘 친구들과 멀어지니 '꼰대'라는 껍질이 조금씩 벗겨졌다. 혼자 남은 성 안. 다시 성문을 열었다. 초등학교 친구 A가 가장 먼저 다가왔다.

"이제 좀 남의 이야기도 들어주네."

의아해서 물었다.

"내 이야기만 했다고? 거친 말은 했지만 상대방 말도 들었어."

"넌 몰랐지? 그 거친 말이 부담이 돼서 듣는 사람이 자기 이야기를 안 할 수도 있다는 사실 말이야."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A를 만난 그날 이후,  말은 조심하되  상대방의 말을 더욱 귀 기울여 듣게 되었다. 들으니까 보였다. 상대의 웃고 있는 표정에서 슬픔을, 침묵에 깃든 대답을 보았다.




 말하기에 대한 고민 후 건축에 관한 명언이  올랐다.

'신은 디테일에 있다.'

거대한 규모의 아름다운 건축물이라도 사소한 부분까지 최고의 품격을 지녀야 명작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 사소한 말 한 마디에 인생 또한 명작도, 졸작도 될 수 있. 말에도 최고의 품격을 담아야 하는 이유다.


굳게 닫힌 성문을 완전히 열고서 나는 명언을 조금 바꿨.


'말은 디테일에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