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째 가는 단골 미용실이 있다. 미용실 아주머니와 친해서 다양한 대화를 한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아주머니가 말했다.
"손님, 사실 저는 냄새를 못 맡아요"
동네에 새 음식점이 생기면 'A메뉴 먹어 봤어요? 정말 맛있더라고요'라며 먼저 물어보던 아주머니. 방금 전춘천 여행에서 닭갈비를 맛있게 먹고 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라 깜짝 놀라 물었다.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거예요?."
"둘째 출산 후 후각을 잃어버렸어요. 병원에서도 회복할 길이 없대요"
"그럼 음식 맛을 못 느끼잖아요?"
"기억하며 먹어요. 옛날에 먹던 향을 기억하면서."
"..."
당황한 표정을 짓자, 아주머니가 웃으며 말했다.
"처음엔 후각을 잃고 많이 우울했어요. 근데 생각을 바꿨어요. 앞으로 또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니 더 즐겁게 살자 마음먹었죠. 이젠 여행도 자주 가고, 음식도 더 맛있게 먹으려 해요."
아프거나 아쉬움이 가득했던 지난날을 바꾸고 싶던 순간이 많았다.
"돈데기리기리 돈데기리기리 돈데돈데돈데~ 돈데크마아아안!"
어릴 적 만화에 나왔던 돈데크만. 괴상한 주문을 외우면 주인이 원하는 과거나 장소로 데려다주는 캐릭터다. 주전자가 주제에 물 끓이는 도구로 취급하면 화내던 장면에 깔깔 웃던 순간이 기억난다. 그러다 문득 과거로 갈 기회가 생기면 나는 어디로 갈까 생각한 적이 있다.
'엄마가 병을 얻기 전으로 돌아가면 엄마를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초등학교 입학 때로 돌아가면 공부 잘하는 학생이 될 수 있을 거야'
어른이 된 후엔 '나비효과'라는 영화를 보며 과거로 돌아가는 상상에 빠졌다. 주인공 에반은 어린 시절에 쓴 일기장을 읽으면 과거로 갈 수 있는 신비한 능력이 있다. 과거로 가는 목적은 단 하나, 사랑하는 연인과의 해피엔딩이다. 하지만 그 바람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랑을 지키는데 급급하면 주변 사람들이 불행해진다. 반대로 연인의 가족이나 친구들을 지키려고 하면 사랑이 어긋난다. 어떤 선택을 해도 모두가 행복할 수 없는 상황. 영화의 메시지는 분명했다. '어떤 선택을 했든 완벽한 현재는 존재할 수 없다.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라!'라는 것.
영화의 교훈이 무색하게 다시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많다. 이루지 못한 첫사랑을 만나기 전으로 돌아간다면?굶어 죽더라도 작가의 길을 묵묵히 걸었다면? 조금만 더 빨리 취업할 수 있었다면? 미용실 아주머니는 어떨까. 아마 출산을 늦추거나 당기는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후각을 잃지 않도록 말이다.
이런 상상들이 유독 재밌는 건 과거 회귀가 절대 불가함을 알기 때문일지 모른다. 문득 그런 생각을 해 보았다.
'과거로 가지 않고, 과거를 바꿀 수 있을까?'
누구나 한 번쯤 지난날을 되돌아본다. 흘러간 시간이 남긴 흉터들. 그 흔적들로 누군가는 절망에 빠져 멈춰 버린다. 하지만 더 나은 내일을 그려 내는 사람도 있다. 앞을 향해 걷는 사람들. 아픔이 스민 한 걸음, 또 한 걸음. 내딛기 어려워도 웃으며 뚜벅뚜벅 걷는다. 그것이 과거를, 나아가 미래를 바꾸는 길이라 믿기 때문이다.
후각을 잃은 뒤 더 맛있게 먹고, 더 즐겁게 지내는 미용실 아주머니. 스스로에게 다정한 그 마음도 상실의 아픔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 아닐까.
"커피 한 잔 마셔요. 이거 원두 향이 너무 좋아요."
미용실을 방문하면 아주머니는 항상 웃는 얼굴로 커피 한 잔을 건넨다. 냄새를 맡지 못하면서 향 좋은 커피라며 건네는 모습이 아름다워 보였다. 평범한 일상에서도 행복한 향기를 맡을 줄 아는 사람. 아주머니의 과거, 아니 내일은 이미 바뀌었다.
매일 아침 커피포트에 물을 끓인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를 마시며 오래전 써 둔 일기를 살핀다. 주전자와 일기라? 만화처럼, 영화처럼 과거로 향하는 기분이 든다.
'2005년 여름, 버스비가 없어 학교에서 집까지 3시간을 걸어왔다.'
서글픔엔 유통기한도 없는 걸까. 일기의 첫 문장부터 괜히 목이 떨렸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