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가져온 두 권의 책 중 가장 두툼한 한 권을 무려 이틀 만에 전부 읽었다. 마치 머나먼 나라에 여행을 다녀온 것처럼, 포근한 기분이다.
수년 전 찾아온 파도로 인해, 우리 집에는 책이 그리 많지 않다.
오래전 우울감이 몰고 온 파도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시간이 있었다. 그 당시에는 책을 쌓아두고 읽는 것마저 피로하게 느껴졌다. 단순한 문장도 침침하고 끈적한 우울에 사로잡혀 조각조각 흩어졌다. 자연히 책은 오래된 책장에 아무렇게나 꽂힌 채로 잠들었고, 구물구물 기어 다니는 좀들의 먹이가 되었다. 방 곳곳을 기어 다니며 묵은 책과 글씨를 갉아먹던 벌레들은 어느새 내 마음에도 스며들어 가장 뜨거운 안쪽부터 파먹기 시작했다.
무수히 많은 낮과 밤을 보내며 마음속까지 기어들어온 좀들이 이제 머리를 노리기 시작할 때, 책들은 버려졌다. 즐겨 읽던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빨간 머리 앤>과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 등은 전부 기억의 파편 속에 남겨졌다. 글씨가 빼곡한 종이의 사이사이에 자리를 잡은 독특한 삽화들도 이제는 눈에 담을 수 없었다. 현관문의 노란 조명을 받으며 반들거리는 새빨간 노끈에 묶이고, 살충제를 맞아 코가 저릴 정도로 독한 냄새에 찌든 책들을 바라보면서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 나는 물을 먹은 이끼처럼 침대에 질펀하게 눌어붙은 채로 한때 가장 사랑했던 책들의 말로를 건너다보았다.
사람은 무언가를 잃은 뒤에야 간절하게 원하게 되던가. 또다시 긴 시간을 보내며 끈덕진 우울을 등에 업고 살아온 나는 어린 날의 추억에 머리를 맡기고 살고 있었다. 집에 찾아온 어린 사촌 동생들에게 가장 좋아하는 책을 펼쳐 읽어주던 때가 떠올랐다. 아이들은 책을 읽어주고, 직접 대본을 만들며 실감 나게 놀아주는 나를 좋아했고, 별이 총총하게 떠오르면 밤의 손길에 머리를 기댄 채로 내가 지은 이야기를 자장가 삼아 잠을 청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엉성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였는데도 아이들은 마치 능숙한 이야기꾼의 목소리를 듣는 것처럼 행복한 미소를 얼굴 가득 피워냈다. 포근하고 달착지근한 향기가 코끝에 맴도는 듯했다.
'어른이 되어가던 나는 한 번도 나에게 책을 읽어준 적이 없었어.'
이제는 아이들이 훌쩍 자라 동화책과 이야기를 즐기지는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가며 울적한 삶만을 영위하던 나는 향긋한 종이 냄새가 배어든 책 대신 작은 스마트폰을 창문 삼아 살아왔다.
물론 그 안에서도 글을 읽긴 했다. 짧고 빠른 문장들, 과하게 부풀린 감정과 지나치게 가벼운 이야기들. 하지만 그것들은 쉽게 사라지는 물거품 같았다. 무언가가 가슴에 남는 대신, 작고 강렬한 불꽃처럼 한순간 번쩍였다가 금방 희미해졌다. 희망이 살아 숨 쉬고 생각할 거리를 안겨주는 책을 멀리하면서부터, 사고방식의 사면이 하얗고 견고한 벽으로 가로막혀 버렸다. 사춘기 시절 하루가 멀다 하고 방문 밖에서 들려오던 부모님의 날이 선 다툼을 피해 얼굴을 묻을 품도 없었다.
마음에서 피어나는 스스로의 목소리를 듣지 않은 지가 오래되었다. 초등학생 시절 좋아하던 소설책에 몰두한 채로 길을 걷다 하마터면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질 뻔했던 날이 떠올랐다. 도서관을 집처럼 여기며,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리는 책이 즐비한 서가를 거닐던 날도 떠올랐다. 추억이 손에 쥐여준 붉은 실을 되짚어 돌아가다 보니 잿빛 세상이 차츰 본연의 색을 찾아가는 것만 같았다.
그토록 사랑하던 책이, 그 안에서 만개하는 수많은 이야기가 하얀빛을 내며 머리 위를 떠돌았다. 검푸른 하늘 위를 달리며 그 품을 눈부시게 수놓는 기억의 성운이었다.
등을 끌어안고 목덜미를 수놓던 달큼한 기억을 맛보며 나는 다시 새로운 책을 빈 책장 안에 조금씩 채워 넣기 시작했다. 그렇게 오래 잊고 있던 책의 무게를 다시 손끝으로 느꼈다.
좀이 갉아먹지 못할 소중한 향기가 배어들 이야기를, 그 무게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