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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상

by 이지원 Mar 19. 2025

 봄의 체취가 옅다.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봄이었다. 가지마다 핀 꽃에 눈길을 주었고, 때로는 나비의 몸짓에 정신이 팔려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멀리 나가기도 했다. 모든 것이 살아있고, 가슴을 드나드는 공기가 가장 잘 느껴지던 계절이었다. 그러나 지금 나의 곁에는 봄이 없다.


 계절의 선물을 받지 못해 앙상한 몸을 드러낸 나무를 보았다. 너희들은 잘못한 것이 없는데, 봄의 선물을 받지 못했다. 가지마다 피어나는 꽃을, 하얗게 쏟아지는 보드라운 봄의 눈을, 온몸을 어루만지는 해의 빛을 감상하지 못했다. 사람도 나무도 길도, 모든 것이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밤이 오면 찬바람이 불고, 낡은 알루미늄 샷시의 틈으로 기어 들어와 바짓단 밑의 하얀 발목을 움켜잡았다. 동장군은 아직 완전히 물러가지 않았다.


 작년 즈음에는 동장군을 주제로 하여 글을 쓴 적도 있었으나, 그 풋풋하면서도 어딘가 뭉그러진 사랑을 떠올릴 수 없었다. 달력에 적힌 숫자가 퍽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늦은 오후에는 잠시 바깥에 나와 하늘을 보았다. 해가 마지막으로 얼굴을 비추는 시간대였으므로, 어느 때보다도 더 밝고 강렬한 빛이 보이고 있었다. 하루의 끝에서 타오르는 빛이 사력을 다해 이곳에 마지막 숨을 퍼뜨렸다. 뜻 없이 구겨 신었던 하얀 신발에, 이리저리 긁혀 거무죽죽한 속살이 드러난 앞코에 찬란한 황금빛이 내려앉았다. 찬바람이 묻은 패딩에도, 좀 전에 잠에서 깨어나 뽀얗게 핀 얼굴에도, 그래서 물기가 조금 어려 있던 눈동자에도 금빛의 햇살이 내려앉았다. 이제 두 번 다시는 오지 않을 마지막 순간처럼 빛났다. 온 세상이 개운하게 피어나는 것만 같았다.


 

 죽어 있는 줄만 알았던 모든 것이, 아직 살아 있었다.

 뜻밖의 일이었다.


 나무들은 아직도 벌거벗은 채로 서 있는데, 어쩐지 가지 끝마다 새로운 꽃이 피어나는 것만 같았다.

온몸을 휘어잡던 동장군의 손도 잠시 물러났다. 뻣뻣하게 굳어 있던 것들이, 저릿하던 몸뚱이가 이제 정말 살아나는 기분.


봄은 틀림없이 살아 있었다.

그 자리에, 다른 얼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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