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입하려고 글쓰기 하는건지 글쓰기를 하려고 몰입하는건지
몰입하려고 글쓰기를 하는지 글쓰기를 하려고 몰입하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확실한 것은 몰입해야 글쓰기란 것을 할 수 있고 글쓰기 하면 자연스러운 어떤 흐름─플로우─속으로 빠져드는 느낌입니다. 인지하지 '못하고' 정신없이 흐르는 시간이 칙센트미하이의 말대로 몰입이라서 빠져나올 쯤에야 알아차리는 것 같습니다. 내가 플로우 속에 있다고 느끼는 '순간'은 말 그대로 찰나의 순간이지만 그 여운과 잔상은 꽤나 오랫동안 머릿속에 맴돕니다. 이 여운과 잔상이 내가 글쓰기 할 수 있는 모티베이션입니다. 그 여운을 또 느끼려고 글쓰기 하는 건지도 모릅니다. 글쓰기 뒤에 오는 행복한 감정은─물이 제 스스로 흐르듯─자기 안에서 나온 힘이라서 막으려고 해도 막을 수 없이 나를 움직이게 합니다.
시간 가는지도 모르게 무언가의 흐름에 몸이 맡겨질 때 우리는 몰입을 체험합니다. [1][2] 칙센트미하이는 몰입을 '플로우'라고 불렀습니다. 왜 나는 몰입을 그저 집중 몰두 열중과 같은 그저 그런 비스무레한 개념만 떠오르는 걸까요. 아마도 추상이 부족한 탓입니다. 플로우는 '아…'하고 깊은 감탄이 나올 만큼 너무도 훌륭한 추상인 것 같습니다. 그는 플로우를 완전히 행위 그 자체에 몰두하여 내가 사라지고 시간 감각이 변형되는 것이라고 정의했습니다.
몰입이라는 의미 이전에 플로우는 '유체의 움직임'입니다. 형태가 고정되어 있지 않은 공기나 물이 유체인데 이것이 어디론가 움직이는 것이죠. 움직임을 물리법칙으로 이해하려는 시도가 '유체역학'입니다. 유체역학을 목욕놀이에 사용할 줄은 몰랐습니다. 아이와 욕실에서 자주 물놀이를 합니다. 우리는 이걸 '유동놀이'라고 합니다. 네 살 아이 발음으로는 '우동놀이'입니다.
뽀로로 캐릭터 목욕놀이 장난감으로 유동놀이를 하는데 물이 흐를 수 있는 여러 관을 연결하는 것입니다. 어떤 관은 직선이고 어떤 관은 기억자로 구부러져 있습니다. 이것만 있으면 원웨이 밖엔 안되니까 'ㅗ'모양도 있어서 투웨이 이상으로 흘려보낼 수도 있습니다. 열었다 잠갔다 하는 밸브도 있어서 유량을 영으로 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연결하고 물을 흘려보내면 꽤나 재미있습니다. '생각한 대로 물이 안 흐르네'하면 다시 연결을 이래저래 옮겨도 보고 높낮이를 바꿔보기도 합니다. 물이 플로잉 하듯 아이와 나의 시간도 생각도 플라잉 합니다.
그러는 동안 아이와 나는 물의 흐름을 우리 뜻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배웁니다. 가령 물이 낮을 곳에서 높은 곳으로 흐르지 않는 아주 단순한 물리법칙 말입니다. 강제로 물을 더 많이 넣어봤자 낮은 곳에 관에서 물이 더 흐르지 높은 곳으로 강제할 수 없습니다. 역학은 가정을 꼭 하는데 외압이나 외력은 없다는 가정입니다. 정치판에서 자주 등장하는 그 외압을 생각하면 됩니다. 외압이 생기면 세상이 복잡해지듯이 역학문제도 복잡해집니다. 우리가 배우는 건 통제하려 하기보다는 그저 물의 흐름에 맡기는 수 밖에는 없습니다. 때론 예상치 못한 구멍에서 물이 흐르기도 하는데 이때가 우리의 호기심을 가장 자극할 때입니다.
한 번은 내가 무언가 가르쳐주고 싶은 욕심에 "물은 어디에서 어디로 흐르지?" 묻고는 바로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거야" 아이는 역시나 "왜 그런 거야?"라고 묻더군요. "중력 때문이야" 답해도 아이는 "아 그렇구나"라고 하지 않습니다. 내게로 되돌아온 말은 '그게 뭐야' 혹은 '그건 왜 그러냐'는 겁니다.
나는 사실대로 말했습니다. "아빠도 몰라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그렇게 만들어졌어" 이것은 내가 아이의 시각에 맞춰서 답하기보단 진실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답입니다. 여기에 '무엇 때문'이라는 말은 옳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중력을 발견한 뉴턴도 왜 중력이 존재하는지는 모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많은 현상에 대해 겉으로 드러나는 이유만 알 뿐입니다. 예를 들면 철이 자석에 붙는 건 '자성'때문이라던지 하는 것들이요. 자성은 철 내부에서 전자가 일정한 방향으로 정렬하기 때문이야 라고 하면 내가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 같습니다.
세상만물의 근본적인 이유는 모르는 경우가 '백 중 아흔아홉'입니다. 거의 대부분이라고 보는 게 맞다고 봅니다. 10년 전만 비교하더라도 대단히 많이 변한 것 같지만 본질적인 속성은 여전히 모르는 상태 그대로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빙산의 일각일 뿐입니다. 겸허한 자세야말로 진정한 지혜의 시작이라는 생각입니다. 이런 모름을 인정하는 자세야말로 세상을 바라보는 경외심과 겸허함을 가르쳐주는 것 같습니다. 아이에게 당장의 명쾌한 답을 주는 것보다 세상의 신비로움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이 더 소중한 교훈이라고 저는 믿고 아이에게 이런 식으로 알려주려고 합니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진정 아는 것이다." (지지위지지 부지위부지) -공자 [3]
"이 사람보다는 내가 더 지혜롭다. 왜냐하면 우리 둘 다 아름답고 훌륭한 것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것 같은데, 이 사람은 어떤 것을 알지 못한다면서도 안다고 생각하는 반면에 나는 내가 실제로 알지 못하니까 바로 그렇게 알지 못한다고 생각도 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는 적어도 이 사람보다는 바로 이 점에서 조금은 더 지혜로운 것 같다. 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것들을 알지 못한다고 생각도 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소크라테스 [4]
글쓰기로 돌아와 보면 글쓰기도 어떤 개념이나 이론을 아는 게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습니다. 그냥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첫 줄에서 시작해 아래로 써 내려가서 마지막 줄 마침표로 끝내는 것 그대로가 자연스럽습니다. 마치 강물이 자연스레 어디론가 흘러가듯 말이죠. 여기에 어떤 개념이나 형식 순서 따위로 그 원인과 결과를 설명하는 것은 딱히 중요하지 않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저 자연스러운 플로우에 나를 맡기고 첫 줄에서 시작해 마지막줄까지 가능한 자연스럽게 써내려 가자는 것이 내가 말하고 싶은 '몰입하여 글쓰기'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생각과 감정을 있는 그대로 끄집어내어 표현하자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문법이나 형식에 얽매여서는 몰입이 금세 깨져서 문장을 치고 나갈 수 없습니다. 방해받지 않고 흐르는 강물처럼 마음껏 무엇이라도 써 내려가다 보면 어느새 글은 결말에 서서히 도달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파울로 코엘료의 흐르는 강물처럼 말이죠.
깊은 밤을 흐르는 한줄기 강물처럼
두려움도 슬픔도 없이 나아가라
마침내 바다에 다다를 때까지
-파울로 코엘료 <흐르는 강물처럼> [5]
*05~09화: 근면하게 글쓰기
*10~15화: 채집하는 글쓰기
*16화~21화: 고립되어 글쓰기
*22화~: 몰입하여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