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할수록 더 외로워지다
수학자 헤이스케가 말한 외로움과 고독의 관계는 참으로 절묘합니다.
외로움은 고독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하는 인간의 감정을 나타낸 말이다.
고독을 잃었기 때문에 외로움이 생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고독을 확고히 갖고 있으면, 좋아하는 사람이나 싫어하는 사람, 어떤 삶과 어떻게 접하더라도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히로나카 헤이스케 [1]
"코로나-19와 같은 전염병이 돌아서 지구상에 모든 사람이 죽고 나 혼자 있다면 당신은 무얼 하시겠습니까?"
이 질문에 과반수가 "살아 있는 사람을 찾겠다"고 답했습니다. [2] 분명히 질문에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 전제를 했는데도 말이죠.
살아있는 생명체는 모두 외롭습니다. 초파리부터 인간 종 호모 사피엔스까지 외로움은 피해야 할 것으로 DNA에 프로그래밍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물고기는 포식자를 피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물고기 떼 중심으로 파고듭니다. 외로우면 인지가 발달한 우리 인간은 결정을 주저하게 되고 네거티브하게 변합니다. 우리가 외로움을 느끼면 다수가 있는 집단에 속하려는 것 역시 생존 확률을 높이고 위험을 줄이려는 본능적 행동입니다. [3][4]
다수에 속하려는 우리는 본능적으로 그렇게도 앞에 '대'를 찾아 헤매는 것 같습니다.
'대단지·대학교·대기업'에 맹목적 다수에 속하려는 우리 마음은 어쩌면 내가 좋아하는 곳 좋아하는 일 그리고 좋아하는 공부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불안과 외로움으로 당장에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럴수록 역설적이게도 더 외로워지는 것은 관계로서의 고립을 잃어서 외로움을 느끼는 것이 아닌가란 것이 나는 생각입니다. [5]
"이 동네 대장이 누구냐"는 아이들 사이의 골목대장뿐만 아닙니다. 어른들도 이 동네 대장을 찾습니다. '대장 아파트'입니다. 나의 애호를 따지기 전에 대장 아파트 가격부터 내림차순 비교해 나의 포지션을 찾습니다. 대장 아파트는 대부분 '대단지'입니다. 2,000세대는 족히 넘어야 좋은 아파트라고 인정받습니다. 똑같은 공간 구조와 똑같은 면적에 살며 우리는 외로움을 달랩니다. 전국 어차피 다 똑같으니까 남은 것은 가격 밖에 없습니다. 이 아파트 가격에 우리는 포모증후근*에 시달립니다. 사람 때문에 외로운 것도 슬픈데 가격에 또 한 번 외로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한 가지 더 슬픈 아이러니는 ’정밀안전진단 E등급‘에 축하한다는 것입니다.
*FOMO(fearing of missing out): 유행에 뒤처지는 것에 대한 공포심리, 소외되는 것에 대한 불안감
'대학교'는 우리 생에 주기에서 건너뛸 수 없는 성인식과 같은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외 없이 거쳐야 하는 관문입니다. 전 국민 같은 연령대가 한날한시에 치르는 시험에 나라가 들썩입니다. 항로도 막히고 직장인 출근 시간도 수험생을 위해 조정합니다. 모두에게 얼마나 중요한 날인지 새삼 느낍니다. 대학교의 의미가 얼마나 대단한지 어떤 분은 이렇게까지 이야기합니다. "스무 살 대학교 간판으로 부모가 교육을 잘했는가 못했는가 판가름 나는 거다." 의견이야 누구나 낼 수 있는 거니까 "그건 절대적으로 틀린 생각이다"라고 내뱉진 않았습니다. 그의 의견은 존중합니다. 다른 사람 의견에 틀렸다고 하는 것엔 정말 조심스럽습니다. 다르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비교적 쉽지만 틀렸다고 생각하는 것은 신중에 신중을 기울이게 됩니다. 그만큼 조심스럽습니다. 그에게 대학교가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 대학은, ‘대학교 = 대부분 비슷한 성적을 받은 학생들이 모인 학교'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대학교 하나로 부모의 교육을 잘했고 못했고를 판가름하는 것은 너무한 거란 입장입니다.'
영어의 입장이 되어 대학을 바라보면 대학은 '유니버시티'인데 그들이 바라보는 포인트는 우리가 바라보는 대학교와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한글로 의역하면 '종합학교' 정도가 될 것 같은데 그만큼 다양한 학문과 다양한 사람이 모이는 곳이란 의미에서 '유니버시티'라고 부르는 건 아닐까. 순전히 내 멋대로 해석입니다.
'대부분 비슷한 성적을 받은 학생들이 모인 학교'에서 다시 '대부분 비슷한 스펙을 가진 학생들이 모은 기업'으로 시프트됩니다.
직장도 직원이 많은 '대기업'에 있을 때 우리는 외롭지 않고 안전하다고 착각합니다. 일단 들어오면 안전하단 생각입니다. 적어도 나는 그랬습니다. 명함이 사라지는 분들을 보고서야 이 착각은 현실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매년 인사이동 시즌이 되면 명함에 '명암'이 아주 분명해집니다. 진급한 자와 누락한 자 그리고 남은 자와 떠나야 하는 자. 어제 까지만 해도 임원과 장기 플랜을 함께 계획하다가도 다음 날 그분의 떠나는 뒷모습이 처음엔 많이 당황스러웠습니다. 몇 해를 지나도 참 익숙해지지 않습니다. 그 초라한 뒷모습은 '남일이 아니구나' 초조하기도 합니다. 대집단에서 혼자 떨어져 나가는 불안인 것 같습니다. 어쩌면 모두가 '짤리기'를 한해 한해 그저 미루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나도 딱히 뾰족한 수는 없습니다. 그 안에서 내가 발버둥 치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계속 찾는 것입니다. 방황하는 것입니다. 운명적 공대생으로서 글 쓰는 것도 하나의 방황입니다. 나의 명함이 날아갈 때 다시말해 직장·직책·직급과 같은 배경 없이 나의 글이 혹은 나의 책이 '나를 설명할 수도 있지 않을까'란 생각입니다.
글쓰기가 아니더라도 나는 계속 공부할 겁니다. 무엇이 될지는 나도 모릅니다. 앞서 말했듯 방황하다보면 찾게 될것이란 믿음뿐입니다. 계획은 없습니다. 내가 신앙은 있지만 진짜 신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릅니다만─앞으로도 모르고 죽는 순간까지도 모르고 죽는 것이 확실하지만─ 만약 신이 있다면 인간을 내려다 보면서 가장 비웃을 것은 “인간이 계획을 세우고 있네”일 것 같습니다.
[2] (설문) 레딧, "지구상의 마지막 인간이라면 당신은 무엇을 할 것인가?"
[3] John T. “인지에 미치는 사회적 고립의 인식” Trends in Cognitive Science
[4] John T. "계통 발생 전반에 걸친 고독과 비교 연구 및 동물 모델에 대한 요청" Perspectives on Psychological Science
*05~09화: 근면한 글쓰기
*10~15화: 채집하는 글쓰기
*16화~21화: 고립되어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