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머신러너 Jul 26. 2024

주사위에 글쓰기(1) - ⚀ 작가지망생

이제 막 드로잉을 시작한 뒷면에선 작가지망생을 짝사랑하는 중입니다


가로와 세로 적당한 크기의 명함은 반듯한 모양입니다. 비즈니스 미팅에서 처음 만나는 분께는 공손하게 반듯한 명함을 건네어드리고 “누구누구입니다” 인사를 나눕니다. 이렇게 10년을 엔지니어 명함에 나를 담아냈습니다. 정확히 올해 1월 '컵떡볶이 어쩌고'하는 난잡한 글을 시작으로 엔지니어 명함 뒷면에 새로운 나를 담아가고 있습니다. 다행히도 명함은 양면이라서 새로운 나를 담을 공간이 남아 있었네요. 명함 뒷면에 '작가지망생'을 각인합니다.

각인하기까지 꽤나 시간이 걸렸습니다. 게임 캐릭터 이름 하나 정할 때와 비슷하게 왠지 근사한 닉네임을 찾고 싶었습니다. 고민 끝에 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를 조합하고 맞춰보니 우연하게 '머신러너'로 정했습니다. 머신(Machine)은 규칙적이고 쉬지 않고 동작합니다. 반복적으로 꾸준히 동작하라면 나도 자신 있습니다. 루틴 한 반복에 큰 저항을 느끼지 않는 나입니다. 그리고 기계공학 전공자로 머신을 만드는 사람이기도 하니까 '머신땡땡'으로 하면 좋겠습니다. '땡땡'에 이것저것 붙여 보았습니다. 머신엔지니어, 머신테크, 머신프로, 머신라이터, 머신파워, 머신플로우, 머신직장인, 머신ML, 머신머신, 머신작가. 머신아빠.


결국엔 지치지 않고 달리는 실천(Running)도 러너고 배움(Learning)도 러너니까 '머신러너'가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경쟁으로서 옆에 주자들을 보고 경주하기보다는 그냥 내 레인만 보고 달리는 머신러너입니다. 무엇으로 달릴까. 딱히 어떤 구체적인 목표를 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구체적인 목표를 정하지 않는 것도 의식적 노력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구체적인 과제나 문제를 선정하는 편이 오히려 쉽고 마음이 편할 수도 있지만 단기 목표가 으레 그렇듯이 나를 태워버립니다. 타고 남은 재를 보면 허무합니다.

부러지지 않을 기세로 몰아세우기보단 말랑말랑한 유연한 촉감으로 사뿐사뿐 달리려고 합니다. 그러려면 레인 구분선을 지워야 합니다. 잠시 다른 사람의 레인을 침범하기도 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가끔은 거꾸로 다시 출발선으로 가보는 것도 오케이. 뒤로 가는데 멈추는 게 안될 것도 없죠. 먼저 앞으로 지나가는 선수에게 박수 쳐주고 내 뒤에 있는 선수들에겐 경려 할 수 있는 여유도 부려봅니다. 그러려면 기준점과 방향 정도만 잡아두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입니다. 기준점은 나의 내면 깊숙한 곳이고 방향은 그 깊숙한 곳에서 가자고 하는 귓속말입니다.


지금 깊숙한 곳에서 가리킨 방향은 브런치 마을입니다. 머신러너 브런치에 글을 쓰면서 흐릿했던 명함 뒷면을 조금씩 채워가고 있습니다. 쓸수록 차츰 선명해집니다. 쓰기 전까지는 알 수 없었던 나의 감정이며 느낌 생각 걱정 불안 감사까지 선명한 렌즈로 바라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너무 선명하면 나쁜 것도 보입니다. 뒷면에 각인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고통은 한 번 아프고 마는 주사와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보단 항상 달고 사는 두통에 가깝습니다. 해보기 전에는 예상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글을 쓰고 싶은 것'과 '글을 쓰는 것'의 차이처럼 완벽하게 다른 차원의 세계입니다.


하나는 다른 사람의 글을 보고 '이것쯤이야 나도 쓰겠다' 라며 고통 없이 자신감을 얻습니다. 다른 하나는 몸이 축나고 '계속할 수 있을까' 자신을 바닥에 내려놓게 됩니다. 하나는 '언젠가'는 쓸 거라는 미래의 안도감을 느낄 수 있고 다른 하나는 '다음엔 또 무얼 쓰지' 미래의 불안감으로 연재 요일이 그렇게 빨리 돌아올 수가 없습니다. 브런치 마을 연재를 이어가는 모든 작가님들은 공감할 겁니다. 적어도 저는 확실히 그렇습니다. 명함 앞면은 앞면대로 채우면서 뒷면을 새롭게 채워가는 일은 생각하는 것 이상의 피지컬 한 업입니다.

앞면과 뒷면을 오가는 쓸쓸한 고군분투임에도 나는 엔지니어 앞면과 작가지망생 뒷면 모두를 사랑합니다. 꽤나 오래 함께한 엔지니어 앞면에 대한 나의 진심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 뒷면에선 이제 막 드로잉을 시작한 단계로, 다시 말해 작가지망생을 짝사랑하는 중입니다. 엔지니어만큼 진심으로 사랑에 빠질는지 시간의 검증대에 섰을 때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입니다.



시간이 흘러 이제 양면을 다 채우면 어쩌죠. 다행히 명함은 양면이 아니라 불행히도 명함은 평면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를 담아내기에는 부족합니다. 머신러너니까 AI-머신러닝도 합니다. 저는 120세까지 살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그러려면 내 명함은 평면 도형이 아니라 입체 주사위는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주사위 여섯 면에 각각 'QR코드' 하나씩 심어서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입니다“를 대신하는 것입니다. 주사위를 채우는 여정이 후회 없는 삶이 될 수도 있다는 의견입니다.

좋습니다. 너무 현실적인 것은 진부하고 그렇다고 해서 너무 비현실적인 것도 싫습니다. 그 사이 어디쯤에 있을 장래희망을 ‘주사위에 글쓰기’로 담아냅니다.



1. 근면하게 글쓰기: 5~9화
2. 채집하는 글쓰기: 10~15화
3. 고립되어 글쓰기: 16~25화
4. 감사하며 글쓰기: 26~34화
5. 주사위에 글쓰기: 35화~ (연재 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