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양동이가 내게 있었기에 내게 '딴짓'을 허락하다
글쓰기가 없던 단면 짜리 엔지니어 삶은 '채움'뿐입니다. 매번 같은 하나의 양동이에 채우고 또 채웁니다. 아직은 내가 담아낼 수 없는 크기의 것이라도 채움으로 일관합니다. 채우다 보면 자연스럽게 담아낼 양동이가 조금씩 커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넘치더라도 채웁니다. 이러한 채움뿐인 나는 모든 신경을 일에 곤두세우고 그 끝이 무뎌지지 않도록 예의 주시 합니다. 예컨대, 잠자기 전 눈을 감고 펼치는 상상의 시간도 그리고 꼼짝없이 적어도 한 시간은 자리를 지켜야 하는 미팅 시간에도 엔지니어링 문제 해결 아이디어를 고민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의 엔지니어 양동이에 물을 채우는 것입니다.
지금은 딴짓을 합니다. 딴짓을 하고 싶습니다. '주사위에 글쓰기'는 딴짓을 말합니다. 딴짓 없이는 도저히 여섯 면의 주사위를 채울 재간이 없습니다. 직업 작가가 아닌 이상 글쓰기도 일종의 딴짓입니다. 글쓰기만큼 딴짓도 없습니다. 에잇 투 파이브를 제하면─파이브까지면 다행이지만─오롯이 글쓰기에 나머지 모든 시간을 양보해야 합니다. 글쓰기에 나머지 모든 시간을 양보한다는 것은 비움과 채움의 뫼비우스입니다. 채움뿐인 단면 짜리 나의 삶에 비움을 가르쳐 준 것은 글쓰기입니다.
양동이에 물이 부족할까 겁내던 것에서 과감하게 아예 비워버리고 새로운 무엇을 담아내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아예 비워버릴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살짝이라도 닿으면 찔릴 것 같았던 날카로움에 무뎌짐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는 노릇입니다. 채운 것이 아까워서 버리지 못하겠다면 새로운 것을 담을 수 없으니 말이죠.
게다가 비우고 새롭게 담아내려는 것이─내게는 글쓰기입니다─ 안타깝게도 이미 채웠던 성질과 반대편의 것이라면 물을 길으러 가는 여정 자체가 노동입니다. 내게 '엔지니어링'과 '글쓰기'는 전혀 다른 세계에 있는 오아시스에 해당합니다. 두 오아시스를 오가려면 근면해야 하는 건 기본 중에 기본입니다. <운명적 공대생의 글쓰기> [1] '근면하게 글쓰기'를 가장 먼저 쓴 것도 이와 같은 맥락입니다. 의지 없이는 해낼 확신이나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비우고 나면 글감을 찾아 채집을 나서야 합니다. 채집하려면 세상에 귀를 기울이고 부족하면 위성 안테나 접시라도 펴서 무엇이라도 담아냅니다. 읽고 듣고 메모하고 생각할 틈을 주고 쉼도 주고 잠도 줄입니다. 채집하는 글쓰기가 세상과의 연결이라면 그 반대로 세상과의 단절하는 '고립되어 글쓰기'를 합니다. 고립되다 보면 또 사람 생각에 '감사하게 글쓰기'가 절로 나옵니다.
채우고 비우고 다시 채우고 비울 수 있는 양동이가 내 손에 있다는 것 자체가 나를 벅차오르게 합니다. 엔지니어 양동이쯤 누군가에겐 뭐 그리 대단할 것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소중한 업입니다.
이 양동이가 내게 있었기에 '딴짓'이 허락됩니다. 주사위 여러 면에 각기 다른 각인을 새기는 행위의 중심에는 역시 엔지니어가 있습니다. 중심은 버티기입니다. 중심이 버텨주는 동안 이것저것 해보는 헛발질이 가능합니다. 엔지니어와 내 일터는 내 중심이고 이 중심이 꿋꿋이 견디어 줄 거라는 믿음 덕분에 내 헛발질은 계속될 수 있습니다.
견뎌내는 모습은 우산과도 같습니다. 내 가족을 지키는 것은 물론이고 나 자신도 지키는 의미로서의 우산말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글쓰기가 공학과는 전혀 다른 세상에 오아시스일지라도 나는 여전히 공학적 사고 체계로 글쓰기를 하는 나를 보며 ‘어쩔수 없는 운명적 공대생이구나’를 실감합니다. 아직은 어색한 글쓰기에 나만의 컬러와 스타일로 각인하기까지는 공학적인 내 자아가 운전대를 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공학인의 본질이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니까 글쓰기도 해결해야 할 하나의 문제로 정의하는 것입니다. 문제를 푸는 방법 중에 중에 내가 좋아하는 것은 최적화라는 기법입니다.
찾고자 하는 변수를 선언합니다 → 예를 들면, 모든 직장인의 숙명 출퇴근 작전도 하나의 변수입니다. 택시를 탈지 버스를 탈지 환승을 할지.
최대 혹은 최소 할 목적 함수를 정합니다 → 쉽게 말해 집에서 직장까지 가는 거리를 최소화 하는 것이 하나의 목적 함수입니다.
그리고 몇 가지 제한 사항을 걸어둔 상태에서 옵티멈을 찾습니다 → 예를 들면, 교통비 삼천 원 이하여야 한다와 같은 제약 사항입니다.
여기에서 '찾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단순합니다. 많이 시행하고 시도한 것 중에서 하나의 옵티멈을 찾는 단순한 반복입니다.
글쓰기로 다시 돌아오면 주제 하나를 정하면 풀어내고 싶은 문제로 바라봅니다. 내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로 바라보면 막연했던 글쓰기가 조금은 선명하게 보입니다. 보일 듯 말 듯한 이때가 글쓰기 전체 과정에서 가장 기대되면서도 글쓰기 재미의 반 이상을 차지합니다. 실제 쓰는 과정은 최적화 '옵티멈 찾기'처럼 단순한 반복입니다. 생각보다 신체가 쓴다는 말이 옳은 것 같습니다. 단어와 문장을 내가 만족할 때까지 단순 반복으로 최적화하는 과정입니다. 여기에 연재 기한이나 분량 정도 제한 사항을 걸어두면 거의 공학 최적화 방법을 글쓰기에 도입하고 있는 셈입니다.
1. 근면하게 글쓰기: 5~9화
2. 채집하는 글쓰기: 10~15화
3. 고립되어 글쓰기: 16~25화
4. 감사하며 글쓰기: 26~34화
5. 주사위에 글쓰기: 35화~ (연재 중)